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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명석의 어차피 혼잔데] 뭐든지 구워 먹는 요술 팬

등록 2023-11-02 07:00수정 2023-11-02 09:18

영화 ‘바베트의 만찬’은 부럽지만, 꼭 한 사람의 노력에만 기대야 할까?
영화 ‘바베트의 만찬’은 부럽지만, 꼭 한 사람의 노력에만 기대야 할까?

[어차피 혼잔데] 이명석 | 문화비평가

가을볕이 좋아 모기들도 좀더 살아보기로 한 날. 나는 사랑해 마지않는 대형 전기 팬을 옥상에 내놓는다. 십오년 전인가? 지인이 선물 받은 팬이 거추장스럽다며 내놓았다. “명절에 전이나 구우면 모를까. 집에 둘 데도 없는데.” 내가 탐을 내자 미심쩍어했다. “아니, 가족도 없는 사람이….” 우려에도 불구하고, 종갓집 가마솥처럼 반들반들 닦아서 잘 쓰고 있다.

옥상문이 열리면 손님들이 들어와 손에 든 것들을 팬에 올린다. 이름하여 ‘뭐든지 가져와 닥치는 대로 구워 먹는 모임’. 마블링 자글자글한 한우, 제철 전어와 해산물, 산지 직송 제주돈 따위는 바라지 않는다. “가능하면 뭘 사지 말고, 집에 있는 걸 들고 오세요.” 냉장고 털이와 식재료 처분을 위한 기회다.

먼저 팬을 코팅할 약간의 기름기가 필요한데, 누군가 충동구매했다가 냉장고 구석에 박아둔 훈제오리 정도면 충분하다. 이어 무대에 오르는 진짜 주인공들은 고구마, 감자, 단호박 따위의 채소들이다. 얘들도 나름의 사연이 있다. 귀농한 친구의 농장에서 우정으로 구매했거나, 큰 맘 먹고 못난이 채소 구독을 했지만 절반도 못 먹고 썩힐 위기에 처했다든지. 가공식품들도 빈 구석을 파고든다. 유통기한 임박에 무작정 사들인 치즈 뭉치, 채식주의자가 명절 선물로 받은 스팸세트.

하나하나는 볼품없지만 올망졸망 모여 있으니 그게 또 예쁘다. 미대 나온 친구가 색과 형을 맞추니 몬드리안의 구성 작품 같기도 하다. 그런데 주변에서 젓가락을 놀리며 수다 떠는 손님들도 이와 닮았다. 지방 출신으로 혼자 사는 친구들, 맞벌이로 바쁜 부부, 적적한 돌싱과 끼룩끼룩 갈매기 가족…. 자체적으로는 이 정도의 식재료를 온전히 소비할 수 없는 인간들이다.

혼자 사는 사람들이 따뜻한 집밥을 그리워한다고 하는데, 그것도 개인차가 있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이라지만 대화라곤 잔소리밖에 없다거나, 그 상을 차리느라 며칠 앓아누울 어머니 걱정이 크다면 오히려 꺼린다. 그렇다면 너무 끈적하지는 않고 적당히 흥겨움을 나눌 정도의 밥상은 없을까?

요즘 농부시장 마르쉐, 을지상회 상생마켓 등 시장 형태 행사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집 근처 용문시장에서도 ‘용금맥’이라는 맥주를 곁들인 음식장터가 10월의 주말에 열렸다. 나는 술을 즐기진 않지만 왁자지껄 떠드는 사람들 틈에서 지글지글 굽고 찌고 튀긴 음식들을 나눠 먹는 재미를 함께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얼굴 아는 사람들끼리 모여 접시를 나누는 일만큼 즐거울 수는 없다.

영화 ‘바베트의 만찬’에선 주인공이 큰 재산과 온갖 정성과 노동력을 털어 마을 사람들을 대접한다. 주변에서 가끔 그런 능력자들을 본다. 산나물 만찬, 김장 수육 파티, 육해공 진미 밥상을 얻어먹고선, 나 역시 보답하려고 잔칫상을 차려볼 욕심을 내보기도 했다. 하지만 준비와 정리가 고되니 점점 피하게 되었다. 차려주는 사람과 먹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함께 요리하고 함께 먹고 함께 치울 방법은 없을까?

외국 생활을 한 교포나 유학생 친구들이 힌트를 주었다. 주말 뒷마당에서 벼룩시장과 함께 여는 바비큐 파티는 어때? 유럽의 게스트하우스에서 흥미로운 경험을 하기도 했다. 여행객들이 근처 시장에서 사 온 식재료로 저마다 요리를 해서 나눠 먹는 거다. 같은 재료라도 출신국에 따라 전혀 다른 맛으로 변모한다. 어릴 적 시골 장의 기억도 떠올랐다. 파장 뒤 모닥불에 가마솥 뚜껑을 올리고 팔다 남은 생선, 배추, 두부 따위를 구워 먹던 모습.

나는 이제 커다란 요술 팬에 모든 걸 맡긴다. 몇시간이고 이어가는 모임이기에, 빨리 구워 빨리 먹는 재료보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익혀 먹는 음식들이 좋다. 조용히 한구석에서 노릇노릇 익어가는 고구마, 멀리 산에서 울긋불긋 물들어 가는 나뭇잎, 그리고 한때 미모를 자랑했던 친구들 얼굴의 새치와 주름들이 잘 어울린다.

겨울이 오면 큰 냄비에 육수를 끓이고, 뭐든지 가져와 삶아 먹는 모임을 할 예정이다. 구이는 재료끼리 영향을 거의 주지 않지만, 탕은 서로 섞이며 맛이 바뀌어간다. 취향이나 비위가 좀더 비슷한 사람들, 요리나 인생의 화학작용을 즐기는 이들이 모여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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