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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매미의 죽음

등록 2023-09-04 18:23수정 2023-09-05 02:40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똑똑! 한국사회] 이광이 | 잡글 쓰는 작가

이른 아침 산 중턱에 올라 숨을 고른다. 늘 하던 대로 팔다리를 굽혔다 폈다 하며 노년에 쓸 근육을 기르고 있는데 무엇이 발 앞에 툭 떨어진다. 옆 참나무에서 ‘맴 맴 매에에에~ㅁ’ 하고 오토바이 시동 꺼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내 앞에 추락한 것은 매미였다. 그러고는 꼼짝을 않는 것이 금세 저세상으로 간 것이다. 졸지에 매미의 임종을 지키면서 곡을 할 수는 없고, 다가가 자세히 보았다. 한마리가 아니라 두마리다. 하나는 누운 채로, 하나는 엎드린 채로 엉켜 있는데 암수의 배 끝에 생식기 같은 것이 연결된 한 몸이었다. 산에 다니면서 이런 것은 처음 보았다. 매미는 7년, 13년, 또는 17년, 소수(素數) 연간을 나무뿌리 밑에 애벌레로 있다가 허물을 벗고 세상에 나와 한달가량 산다고 한다. 수컷은 밤낮을 울어 사랑을 나누고 배태한 암컷은 알을 낳은 뒤 명을 다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무슨 조화인가? 자연사인가, 혹은 정사(情死)인가?

그렇지 않아도 글 소재가 궁하던 차에 나를 긍휼히 여긴 뮤즈의 선물인가 하여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그래도 별로 떠오르는 것이 없다. 로맨티시즘과 에로티시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다가 시인이라면 제문이라도 지을 것을, 하였다. 시인 이성복이 골목길 차창 유리에 들러붙은 빨간 석류 꽃잎 하나를 보고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 꽃잎에 대해 아무 말도 못 했는가’라는 제목의 긴 산문을 쓴 것이 생각난다. 꽃잎의 색을 가지고는 ‘터져버린 빨간 고무풍선의 발려 비틀린 조각, 50사단 근처 도살장으로 실려 가던 허연 돼지의 분홍빛 음부’라거나, 꽃잎의 처지를 가지고는 ‘돌 속에 긴 머리를 잠그고 엎드려 있는 로댕의 ‘다나이드’, 금박이 벗겨진 시계의 헐거운 줄, 기도하는 마리아의 긴 옷자락’을 들먹이며 현란하게 쏟아낸 이미지의 변주들.

한쌍의 매미가 죽던 날은 광복절 즈음, 무성한 여름이었다. 그날 이후 매미와 꽃잎과 잡념이 뒤섞인 채로 여러 날을 골몰하면서 나는 여름 무더위 속을 헤매었다. 그러다 어느 날 아침, 하안거의 무문을 박차고 나와 저 희끄무레 동터오는 하늘을 응시하는 선승처럼 홀연히 깨달은 바 있었으니, 그것은 ‘여름이 곧 끝날 것’이라는 한 소식이었다. 사실 이 깨달음은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그저 평범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염소 뿔도 녹인다는 복중에, 아열대의 불볕이 영영 지속될 것 같은 이 운수 사나운 액달(厄月)의 정상에서, 그 끝을 내다보는 것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예견대로 여름은 꼬리를 감추고 세상은 처서와 백로 상간의 가을로 접어들지 않았는가?

‘오동 한잎 날리자 천하가 가을이라’(조두순), 잎 하나로 여름의 끝을 짐작하듯이 내가 광복절 경축사를 들으면서 저 여름도 곧 끝날 것이라고 알아차린 것은 ‘자유’라는 말이었다. 자유, 자유, 하며 스물일곱번이나 되풀이한 그 자유는 정녕 ‘늙은 자유’였다. 전쟁을 부르는 냉전시대의 늙은 자유, 간도 쓸개도 없이 남이 아니면 지키지도 못할 굴종의 자유, 남북으로 동서로 가르고 쪼개는 분열의 자유. 그리고 핵 오염수에는 찍소리도 못하면서, 홍범도를 다시 죽이는 저 친일의 자유는 누구를 위한 자유인가? 저래 가지고는 얼마 못 간다. ‘만인이 욕하면 사람이 죽는다’고 했다. 술집마다 거리마다, 만인이 욕을 하는 저런 자유로는 금방 자빠지고 말 것이다.

다산이 제자들에게 당부하는 글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일등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얼마 못 가 꺾이고 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아침이 아니면 저녁일 것이니, (그게 언제인지) 굳이 애써 점칠 필요는 없다.’

가을이 사립문 안으로 들어왔다. 땅으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 오고, 하늘로는 뭉게구름 타고 온다더니 계절의 순행이 이토록 엄연하다. 매미가 죽고 이 무성한 여름이 끝나듯이, 어느 아침이 아니면 저녁에 저 포악한 여름도 끝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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