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 한국사회] 허진이 | 자립준비청년
“우리 부모님은 이번 연휴에 해외여행 가신대요.”
명절을 앞두고 친한 아기 엄마들이 내게 본가에 가는지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아기가 돌이 지나도록 친정 이야기를 한번도 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던 눈치다. 나의 배경에 대해 떠보듯 묻는 엄마들의 질문에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하고 대화에 마침표를 찍었다.
현재 나는 아름다운재단의 ‘열여덟 어른’ 캠페이너로 3년째 활동하며 자립준비청년으로서 대중과 소통하고 있다. 캠페이너 활동이 아닌 사생활에서는 여전히 거짓된 ‘나’로 관계를 맺고 있다. 자립준비청년에게 자신이 보육원에서 자랐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열여덟 어른’ 캠페인에서 자립준비청년 5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를 보면, 보육원 출신인 것을 밝히지 않은 이유를 묻는 질문에 ‘괜한 편견이 생길 것 같아서’(64%), ‘친구들하고 멀어질 것 같아서’(9.1%),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서’(9.1%)라고 응답했다. 또한 어떤 친구들은 ‘고아+커밍아웃’이라는 뜻의 ‘고밍아웃’이라는 말까지 사용하면서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의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나 역시 자립준비청년임을 고백하는 일이 아직까지도 쉽지 않지만 한때는 나만의 무기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대학 면접 당시 자기소개 때 보육원 출신임을 밝혔더니 눈물을 보이거나 그동안 고생 많았겠다며 다독여주는 면접관도 있었다. 친하게 지내고 싶은 친구에게 뜬금없이 가정사를 고백해 다가가기도 했고 교수님 상담을 통해 장학금을 받는 데 도움을 얻기도 했다. 나는 필요할 때마다 나의 무기를 꺼내 들었고 효과는 확실했다.
그러던 중 이내 비장의 무기가 오히려 나를 옭아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보육원 출신임을 밝히면 보통은 주변으로부터 이해나 배려를 받는다. 손수 만든 음식을 챙겨주거나 실수를 해도 경험이 없겠거니 이해하고 자신들의 말과 행동으로 상처를 주지 않을까 조심하는 모습들 말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서 어느새 ‘자립준비청년’ 정체성에 갇혀 그 너머의 모습을 내보이기가 힘들어졌다. 열심히 사는 모습만 보여야 할 것 같고, 어쩌다 비싼 옷이나 음식을 사 먹는 게 남을 속이는 것 같아 눈치를 보기도 했다. 결국 지난날 나의 성급한 고백들이 오히려 자립준비청년의 왜곡된 이미지에 더 짙은 색안경을 덧대어 나를 가둔 꼴이 된 것이다.
이보나·정익중의 ‘시설 퇴소 청년의 자기 공개 경험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청년들은 출신을 밝히는 일에 대해 ‘항상 긴장되는 일이기도 하고, 한편으로 후련한 일이기도 했지만, 나를 바라보는 편견 어린 시선을 겪어내야 하는 복합적인 감정을 수반하는 일’이라고 밝혔다.
자립준비청년이 고백을 망설이는 것도, 이용하는 것도 사회에 깊숙이 자리 잡은 편견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고백이 편안해지기 위해서는 자립준비청년을 ‘보통의 청년’으로 보는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
이와 함께 자립준비청년 당사자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는 것도 필요하다. 앞서 언급한 연구에서는 ‘참여자들이 자신의 다양한 정체성 중 하나인 시설 퇴소 청년을 개인 고유의 특성과 혼동하는 것처럼 보였다’는 내용도 있었다. 자립준비청년 당사자가 스스로를 ‘시설 퇴소 청년’의 정체성에만 가두지 않도록 해야 한다. 나의 상황을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말하기 어려운 개인 사정’ 정도로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상대가 판단하는 자립준비청년이라는 나의 정체성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믿고, 용기를 내어 의연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어떨까.
김성식 작가의 책 ‘안녕, 열여덟 어른’은 ‘언젠가는 열여덟 어른이라는 정체성을 벗어내기를 바란다’는 구절로 끝을 맺는다.
자립준비청년이라는 정체성에서 벗어나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믿고 다양한 미래를 상상하고 꿈꾸며 사는 것, 그것이 사회와 당사자들에게 주어진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