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강원도 철원군 소이산 정상에서 바라본 철원평야. 논 위쪽 숲이 비무장지대이고 숲 근처 산들이 한국전쟁 때 고지전이 벌어진 곳이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한겨레 프리즘] 권혁철 | 통일외교팀장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가 “굴종적으로, 겉으로 보이는 한산한 평화로운 상황이 평화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지난 19일(현지시각) 유엔(UN) 총회가 열리는 미국 뉴욕 프레스센터에서 기자들과 만나 전날 문재인 전 대통령이 ‘진보 정부에서 안보 성적도 월등히 좋았다’고 발언한 데 대해 이렇게 반박했다. 그는 “압도적으로 힘에 의해서 상대방의 기만과 의지에 관계없이 구축하는 것이 진정한 평화”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자, 며칠 전 갔던 아이스크림 고지가 떠올랐다. 나는 지난 15~16일 한겨레가 창간 35년 ‘삼삼오오’ 기획의 하나로 한겨레통일문화재단과 함께 마련한 1박2일 ‘DMZ(비무장지대) 생태평화기행’에 참가해 주주·독자·후원회원과 함께 강원도 철원 지역을 다녀왔다.
철원 민간인 출입통제선을 지나 남방한계선을 향해 올라가면 해발 219m 얕은 산인 아이스크림 고지가 보인다. 이 산은 원래 이름이 삽슬봉인데 아이스크림 고지로 더 유명하다. 한국전쟁 당시 엄청난 포격으로 산이 마치 아이스크림 녹듯 흘러내렸는데 이를 목격한 외신기자가 아이스크림 고지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나는 ‘아이스크림 고지’는 외신기자가 한국전쟁에서 죽고 다칠 일이 없는 자국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붙인 별명이란 생각이 들었다. 당시 산의 흙과 나무가 녹아내릴 정도로 폭격이 이뤄졌는데, 이곳에서 싸웠던 군인들의 몸은 온전했을까. 실제 이 지역에서만 4만~5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70여년 전 녹아내린 것은 산뿐만 아니라 젊은이의 살과 뼈였다. 전쟁 당사자인 한국 언론 기자라면 차마 아이스크림 고지란 ‘한산한 이름’을 붙이진 못했을 것이다.
아이스크림 고지뿐만 아니라 1951년 7월부터 1953년 7월까지 한국전쟁 휴전회담을 하는 동안 중동부 전선에서는 치열한 고지전이 벌어졌다. 저격능선 전투는 백마고지 전투와 함께 대표적 고지전이다.
저격능선은 철원 오성산 남쪽에서 남대천 부근인 김화 지역을 향해 뻗어 내린 돌출 능선이다. 이곳에서 1952년 10월14일부터 11월24일까지 국군과 중공군이 손실을 돌보지 않고 오직 ‘목표’를 탈취하기 위해 소모전을 감행했다. 42일 동안 ‘가랑잎처럼 쌓인 시체를 밟고…’(저격능선 전투 전적비 비문) 혈전에 혈전이 벌어졌고, 2만~3만7천명의 젊은이들이 죽고 다쳤다. 저격능선은 규모가 작아서 능선 위에서 소대단위 기동만이 가능할 정도로 좁은 지역이다. 1㎢ 땅을 차지하기 위해 양쪽 군인들이 밀집대형으로 한꺼번에 희생된 것은 세계 전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왜 한국전쟁 때 참혹한 고지전을 멈출 수 없었을까? “이 기간 벌어진 고지쟁탈전은 휴전협상 난국을 타개하는 수단으로 이용됐고, 양쪽은 군사적 승리보다는 상대방에게 타격을 가하는 수단으로 특정 지역에 대한 공방전을 감행했다. 고지 하나를 탈취하기 위해 무수한 생명이 희생되는 기형적인 고지쟁탈전이 전장을 지배했다.”(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70여년 전 고지전이 정치적 수단으로 되면서, 누군가의 귀한 아들과 남편이 가뭇없이 사라졌다. 남북관계를 이기고 지기를 거듭한 고지전의 잣대로 보면 “겉으로 보이는 한산한 평화로운 상황이 평화는 아니다”란 대통령실 관계자의 스산한 말이 나온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달 중순 철원 비무장지대 근처에는 ‘雖死不敗’(수사불패: 비록 죽을지언정 패배는 없다)란 구호판 옆에서 장병들이 근무하고 있었다. 기성세대가 이들에게 수사불패를 요구하기 전에, 더 이상 젊은이들이 휴전선을 지키다 피를 흘리지 않게 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원 기행 뒤 ‘힘에 의한 평화가 진정한 평화’란 대통령실 관계자의 말을 듣고,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이 스페인 내전을 다룬 ‘카탈로니아(카탈루냐) 찬가’에 쓴 글이 생각났다. “전쟁의 가장 끔찍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모든 전쟁 선전물, 모든 악다구니와 거짓말과 증오가 언제나 싸우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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