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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곤혹스러운 영화계와의 갈등…기적같은 해피엔딩으로

등록 2023-09-25 14:14수정 2023-09-26 02:36

[길을 찾아서] 참여정부 천일야화 34화 스크린 쿼터 2

2003년 11월21일 오후 서울 프레스 센터에서 열린 영화인들의 ‘대통령 면담 결과 발표 및 스크린 쿼터 사수 기자회견’에서 ‘한·미투자협정 저지와 스크린 쿼터 지키기’ 영화인대책위원회의 안성기 공동위원장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2003년 11월21일 오후 서울 프레스 센터에서 열린 영화인들의 ‘대통령 면담 결과 발표 및 스크린 쿼터 사수 기자회견’에서 ‘한·미투자협정 저지와 스크린 쿼터 지키기’ 영화인대책위원회의 안성기 공동위원장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11월13일(목) 오후 3시 규제개혁위의 대통령 보고가 있었다.(세종실) 안문석 위원장이 능숙한 솜씨로 사회를 잘 보았다. 노무현 대통령이 긴 마무리 발언을 하며 규제개혁에 관한 평소 소신을 피력했다. 노 대통령이 길거리 신용카드 발급을 허용했다고(20화 카드대란 참조) 규제개혁위를 비판하자 김대환 교수가 그건 오해라고 바로잡았고, 안문석 위원장이 추가 설명을 했다. 회의 마치고 나오면서 규제개혁위원 제프리 존스가 스크린 쿼터 관련 최근 한미 영화계의 대화 진행상황을 알려주겠다고 나한테 이메일 주소를 물었다.

화기애애했던 영화인과 만찬
노 대통령, 권오규 수석 반박
잇따라 영화계 동조하는 발언

11월19일(수) 저녁 6시 대통령 관저에서 영화인 초청 만찬이 있었다. 노 대통령 부부와 이창동 장관, 정지영 감독, 배우 안성기·명계남·장미희·문소리, 양기환 영화인회의 사무국장, 심광현(한예종)·이해영(한신대)·정재형(동국대) 교수, 권오규 정책수석과 내가 참석했다. 배우 안성기에게 지난번에 찍는다던 영화 ‘실미도’는 다 찍었는지 물어보니 연말에 개봉한다고 했다. 정지영 감독한테는 영화 ‘남부군’을 잘 보았다고 인사했고 배우 명계남과는 전년도 대선 때 대구에서 만났던 일을 이야기했다. 장미희, 심광현, 양기환은 몇달 전 스크린 쿼터 회의를 같이했던 구면이라 반가웠다.

노 대통령이 부엌을 경상도에서는 ‘정지’라고 부른다고 하니, 배우 안성기가 그런 말은 처음 들어본다고 했다. 내가 “이 말은 고어인데 고려 때 ‘청산별곡’에 ‘가다가 가다가 드로라 에졍지 가다가 드로라’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 뒤 경상도에서는 그 말을 계속 쓰고, 서울에서는 사라졌다”고 설명하니, 노 대통령이 “청와대에는 저런 골치 아픈 사람이 있어요” 라고 놀려 일동 폭소. 이창동 장관은 “제가 국어교육과 출신인데도 몰랐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이 “오늘 영화인들이 온다고 해서 어제 ‘황산벌’ 영화 봤어요”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이 “(아직 영화관에 가야 볼 수 있는) 영화를 비디오로 보다니 대통령이 세긴 세군요”라고 하자, 이창동 장관이 “대통령이 센 게 아니고 장관이 세지요”라 해서 다시 일동 폭소. 대통령이 홈시어터를 통해서 영화를 보는데 갑자기 화면에서 발소리가 나서 이상하다 했는데, 아들 건호가 걸어오는 소리였다고 말했다. 영화인들은 홈시어터에서는 음향 관계로 그런 착각을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자연히 스크린 쿼터로 화제가 넘어가자 영화인들은 쿼터를 지킬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권오규 정책수석이 미국과 양자투자협정(IBT), 자유무역협정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반론을 펴자, 노 대통령은 “그건 오늘 새로 나온 이론이고…” 하면서 의외로 순순히 영화인들에게 양보하는 발언을 두번이나 했다. 대통령은 “그거 없이도 한국영화 아무 지장 없지 싶은데…. 그리고 영화인들이 설마 나를 도와주지 않겠나 그것 두가지 뿐”이라고 하며 영화인들 입장에 동조했다.

민감한 주제여서 혹 문제 될라
‘국제사회와 약속 중요하다’며
절충론 제기하자 수긍 분위기

좀 문제다 싶어서 내가 브레이크를 걸었다. “지난 6월 대통령께서 스크린 쿼터 숙제를 주셔서 제가 여기 오늘 온 분 중 절반 정도를 만나 대화했는데, 아직 숙제를 다 못해 죄송하다. 양자투자협정이나 40억불 투자가 중요한 게 아니고, 미국에 우리가 먼저 하자고 해놓고 약속을 못 지키면 미국과 국제사회 보기에 한국은 약속을 안 지키는 나라가 된다. 한·칠레 자유무역협정도 그 자체는 별거 아니지만 통과되지 않으면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신용이 떨어지니 국회 비준이 반드시 필요하다. 한국영화와 문화산업이 앞으로 계속 성장하고 효자노릇 할 것이라 믿는다. 한국 사람들은 영화나 문화 방면으로 아주 재주가 많다. 지금 한국영화 살리기 위해서 스크린 쿼터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 인정한다. 그러나 날짜가 문제다. 한국은 40%를 주장하고 미국은 20%를 주장하는데, 절충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날짜 연동제를 해서 파도가 세면 담장을 높이고, 약하면 낮추는 식이 가능하다.”

말을 마치자, 배우 명계남이 대뜸 “나는 정책실장 의견에 찬성”이라고 지지했다. 심광현, 정재형 교수도 약간 동조하는 눈치였다. 노 대통령이 “정책실장 의견은 절충형인데, 말하자면 날씨 추우면 외투를 더 두껍게 입고, 이런 식인데…”라고 정리했다.

노 대통령, 민감한 정치 발언도
영화인들 기자 개별접촉 안해
결과적으로 대형 언론사고 피해

노 대통령이 “스크린 쿼터 같은 골치 아픈 이야기는 그만하고…”라며 화제를 돌려 정치, 북핵, 부시와 담판을 이야기하다가 국가기밀 비슷한 내용도 튀어나오고. 농담도 해가며 신나게 이야기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내가 영화인들하고 싸우게 됐나. 싸우려면 (정치인) ○○○ 같은 인간하고 싸워야지”라고 했다. 순간 옆에 앉은 권양숙 여사가 낯빛이 변하며 안절부절못했다. 까딱하면 대형 언론사고가 날 뻔한 순간이었다. 다행히 영화인들은 입이 무거웠다.

영화인들은 원래 우군이라 3시간 넘게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대화가 잘 됐다. 대통령과의 식사가 3시간 넘어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영화인들은 정리 모임을 가지러 어디론가 가고 나는 귀가했다. 그 뒤 이창동 장관이 전하길, 그날 저녁 다수의 영화인이 모처에서 청와대 모임의 귀추를 궁금해하고 있었고 청와대 모임 참석자들도 거기에 합류해 “오늘 모임에 관해 기자들에게 일절 개인적으로 이야기하지 말고 문서를 만들어 발표하자”고 합의하고 문장을 작성했다고 한다. 그만큼 스크린 쿼터는 예민하고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사안이었다.

2003년 10월19일 제11차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차 타이를 방문 중인 노무현 대통령은 미국 기업인들과 간담회에서 스크린 쿼터 축소 문제와 관련, “경제·무역 종사자들은 줄여 나가길 바라고, 영화와 영화산업 종사자들은 강력 반대하고 있다”며 “이 문제가 외국인투자에 장애가 안되도록 (영화업계에 대해) 설득 노력을 계속해 가능한한 빠른 시일 내에 해결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노무현사료관 제공
2003년 10월19일 제11차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차 타이를 방문 중인 노무현 대통령은 미국 기업인들과 간담회에서 스크린 쿼터 축소 문제와 관련, “경제·무역 종사자들은 줄여 나가길 바라고, 영화와 영화산업 종사자들은 강력 반대하고 있다”며 “이 문제가 외국인투자에 장애가 안되도록 (영화업계에 대해) 설득 노력을 계속해 가능한한 빠른 시일 내에 해결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노무현사료관 제공

11월21일(금) 오전 대통령이 국회에 보내는 균형발전 3법 관련 서한 내용을 해설하러 춘추관에 갔다. 3법에 관해 묻는 기자는 한명도 없었고, 오로지 스크린 쿼터, 부안 사태(핵폐기장), 정책실에 경제수석 신설하는지만 물었다. 내 입에서 무심코 “장사가 영 안 되네”라는 말이 툭 튀어나왔다. 옆에 있던 정책실 안재훈 국장이 와이티엔(YTN) ‘돌발영상’에 나올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나오지 않았다. 기자들이 따라 나오며 계속 부안 사태, 스크린 쿼터만 질문했다.

‘스크린 쿼터 사수’ 투쟁 최고조
직후에 한국영화 르네상스 맞아
기적처럼 풀린 ‘난제 중 난제’

1967년 시작된 스크린 쿼터 제도는 처음에는 주의를 끌지 못했고, 전국 수많은 영화관에서 국산 영화를 며칠 동안 상영했는지 취합하기도 어려워 사실 유명무실한 제도였다. 그러다가 1988년 미국 영화 한국 직배가 시작되면서 한국 영화는 존폐 위기에 직면했다. 당시 할리우드 영화를 상영하는 서울 몇몇 극장에 직배를 막아보려고 뱀을 풀어놓은 유명한 사건도 있었다. 그러면서 스크린 쿼터는 미국 영화의 태풍에 맞서는 한국 영화의 수문장이 됐다. 외환위기 이후 미국 투자가 절실했던 한국 정부가 양자투자협정을 추진했는데 미국 쪽에서 스크린 쿼터 폐지를 요구하고 나왔다. 국내에서도 경제관료들과 시장만능주의 경제학자들, 보수 언론은 스크린 쿼터에 부정적이었다. 영화계는 성명서 발표, 삭발 등 스크린 쿼터 사수 투쟁을 벌였다. 그 투쟁이 참여정부 때 절정에 도달했다. 참여정부는 노 대통령을 적극 지지하던 영화계와 맞서야 하는 난처한 처지가 됐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해를 넘겨 2004년이 되자 갑자기 한국 영화에 봄날이 찾아왔다. ‘태극기 휘날리며’(1170만명), ‘말죽거리 잔혹사’(310만명), ‘내 머리속의 지우개‘(250만명) 등에 관객들이 몰리면서 국산 영화 극장점유율이 50%를 넘을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국제영화제에서 한국 영화와 감독들이 큰 상을 거머쥐는 기적 같은 일이 연달아 일어났다. 그러면서 스크린 쿼터 문제는 봄눈 녹듯 스르르 소멸해버렸다. 하늘의 조화라고나 할까, 참으로 희한한 해피 엔딩이었다. 이런 기적의 원인은 무엇일까? 검열제 폐지(노무현 설)나 영화의 품질 향상(조석래 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추운 겨울을 견디게 해준 스크린 쿼터의 역할(이창동 설)도 무시할 수 없다.

필자 이정우: 1950년 대구에서 나고 자랐다. 1974년 서울대 경제학과 학·석사를 마친 뒤 1983년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2015년 경북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한 뒤 명예교수를 맡고 있다. 2003~05년 참여정부 초대 정책실장, 정책기획위원장 겸 정책특보를 지냈다.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자 끊임없이 공부하는 경제학자를 자임하고 있다. ‘참여정부 천일야화’ 제목은 그의 친필이다. opinion@hani.co.kr
필자 이정우: 1950년 대구에서 나고 자랐다. 1974년 서울대 경제학과 학·석사를 마친 뒤 1983년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2015년 경북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한 뒤 명예교수를 맡고 있다. 2003~05년 참여정부 초대 정책실장, 정책기획위원장 겸 정책특보를 지냈다.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자 끊임없이 공부하는 경제학자를 자임하고 있다. ‘참여정부 천일야화’ 제목은 그의 친필이다. opini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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