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사회적 대화’ 불발, 애석하고 통탄스러워

등록 2024-01-22 15:34

[길을 찾아서] 참여정부 천일야화 50화 미완의 개혁: 노동 2

 

2005년 5월26일 방한 중인 빔 콕 네덜란드 전 총리(가운데)가 이수호 민주노총 위원장(오른쪽),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을 만나 손을 맞잡고 있다. 빔 콕 전 총리는 1982년 노동자 대표로 네덜란드의 사회적 대타협인 ‘바세나르 협약’에 참여한 뒤 정계로 진출해 1994년 총리가 돼 2002년까지 국정을 이끌었다. 연합뉴스

2004년 2월29일~3월12일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장으로서 노사 대표, 학계 전문가와 함께 유럽 노사관계 견학을 다녀왔다. 스웨덴, 네덜란드, 독일의 노조, 경영자 단체, 정부 관계자들을 만나는 일정이었다. 학계 전문가로 이종오(전임 정책기획위원장) 명지대 교수와 최영기 노동연구원장이 함께 했다. 경총에 이어 한국노총이 찬성해 이용득 금융노조 위원장이 동행했는데, 민주노총은 답을 미루다 결국 거절했다.

네덜란드 경제는 1980년대 초 고비용, 고실업에 제2차 석유파동까지 겹쳐 최악의 스태그플레이션에 빠졌다. 1981~82년 연속 마이너스 경제성장에 실업률 9%, 재정적자는 국내총생산(GDP)의 6.2%까지 늘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네덜란드 노사는 1982년 11월 임금인상 자제와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고용 증대에 합의한 ‘바세나르 협약’을 체결, 극적으로 위기를 타개했다. 이후 10년간 일자리 200만개를 창출하고 실업률을 9%에서 5%로 낮추어 경제위기를 극복했다.

바세나르 협약에 서명한 노조위원장이 빔 콕이었다. 그는 몇년 뒤 경제장관으로 발탁됐고, 1994년 총리가 돼 2002년까지 두차례 연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우리 일행은 3월4일(목) 오후 2시 네덜란드 사회경제위원회(SER)에서 빔 콕을 만났다. 거인다운 풍모의 초로 신사가 온화한 미소로 우리를 맞이했다. 빔 콕은 협약 당시 노동운동 동지들로부터 배신자라고 비난받을 때 엄청 괴로웠다고 토로했다. 2시간 동안 이런저런 대화가 이어졌다. 빔 콕은 자기가 말하긴 좀 뭣하지만 어떨 때는 노조의 반대를 무릅쓰고 개혁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면서 독일 ‘아젠다 2010’을 예로 들었다. 최영기 원장이 네덜란드의 노조, 정당 간 관계를 질문하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1960~70년대까지만 해도 양자는 엄격히 분리돼 있었으나 지금은 다르다. 나는 34살에 노조위원장이 됐고, 47살에 정치에 뛰어들었는데 후회는 없다. 나는 표준 패턴에서 벗어난 사람인데 남에게 권할만한 행로는 아니다.”

2004년 2월9일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에크하르트 로캄 독일 티센그룹 회장을 접견하고 있다. 노무현사료관 제공

3월11일(목) 오전 지멘스와 더불어 독일을 대표하는 다국적기업 티센-크루프의 뒤셀도르프 본사를 방문하여 로캄 회장, 슐렌즈 노조위원장과 오찬을 하며 장시간 대화했다. 먼저 노동자 경영참가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했다. 나치 붕괴 이후 기업에도 민주주의 원칙을 도입하기 위해 아데나워 보수당 정부 때 노사 공동결정제도를 도입했다. 노동자 대표가 의사결정에 참가하는 대신 성과 개선을 위한 책임도 같이 지는 방식이다. 이후 종래 대결적 노사관계가 대화와 타협의 노사관계로 바뀌었다.

공동결정이니 노사가 각각 절반의 투표권을 갖고 있지만 티센-크루프에서는 한번도 표 대결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최종 결정 전까지 끊임없이 정보를 교환하고 대화로 이견을 좁혔다는 뜻이다. 내가 물었다. “다른 나라에는 없는 노사 공동결정 제도를 운용하려면 엄청난 시간과 노력, 비용이 들 텐데 문제점은 없나요?” 노동자 대표 슐렌즈와 로캄 회장이 답했다. “대화 과정은 길지만 그 대신 합의가 되고 나면 추진력이 생기므로 길게 보면 시간낭비가 아니다.” 노사가 같은 답을 내놓는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한국의 노사가 이런 생각을 하면 세상이 얼마나 달라질까.

유럽여행에서 우연히 만난 축구 영웅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유럽행 비행기에 벨기에 프로축구리그에서 뛰던 설기현 선수가 아장아장 걷는 귀여운 아들을 데리고 탔다. 비행기에서 20분 정도 대화했다. 그는 벨기에의 자기 집에 놀러 오라고 초대했는데 갈 시간이 없어서 유감이었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는 김금수 노사정위원장, 윤진호 교수, 여상태 선생을 우연히 만나 차 한잔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건장한 사나이가 눈앞에 나타났다. 차범근 감독이었다. 공항에 나왔다가 내가 와있다는 소문을 듣고 인사하러 왔다고 했다. 내가 무슨 대단한 사람도 아닌데 이런 황송한 일이 있나. 잠시 차를 마시며 대화하는 행운을 누렸다. 차범근, 설기현에게서는 운동선수 특유의 솔직함과 시원시원함이 느껴졌다.

2005년 2월1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민회관에서 열린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에서 노사정 대화체제 복귀를 뜻하는 사회적 교섭 안건 처리에 반대하는 대의원들과 참관인들이 단상을 점거하려다 찬성하는 쪽과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이수호 위원장(가운데)이 고뇌에 찬 표정으로 앉아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해가 바뀌어 2005년 5월1일(일) 오후 5시 노동연구원 황덕순 박사(나중에 문재인 정부 일자리수석), 박영삼(전 매일노동뉴스 기자) 그리고 메이데이 행사를 막 끝내고 온 한국노총 이용득 위원장과 넷이서 비정규직 입법 문제를 의논했다(할리데이인호텔 일식당). 당시 파견근로자와 기간제근로자 보호입법이 추진 중이었다. 정부와 사용자 쪽은 파견과 기간제 기간 상한을 각각 3년으로 하고(3+3) 해고 제한을 두자고 주장한 반면, 노조 쪽에서는 파견과 기간제 각각 1년에 이를 넘기면 고용한 것으로 간주하자(1+1+고용의제)고 주장했다. 열린우리당 국회 환노위 간사였던 이목희 의원이 절충안으로 2+2안을 내놓았다.

단식 10일째였던 이용득 위원장은 초췌한 얼굴로 물만 연거푸 여러 잔 들이켰다. 이 위원장은 2+2를 하느니 3+3이 낫고, 1+1+고용의무가 마지노선이라고 주장했다. “10원짜리 물건을 110원에 살 수도 있다. 그러면 다음에 80~90원에 팔 수도 있고, 이번엔 정부가 좀 양보해야 한다. 지금까지 억지로 민주노총을 끌고 왔는데 내일 회의가 기로다. 이목희 의원과 김대환 장관에게 전화를 좀 해달라.”

김대환 장관은 이수호 민주노총 위원장과 고등학교 동기인데도 회의 때 서로 등지고 앉을 정도로 사이가 나빠졌으니 나더러 설득 좀 하라는데, 나도 대학 동기이지만 자신 없었다. 이목희 의원과 통화해 협상 타결을 독려했고, 김대환 장관은 전화를 걸었으나 잠자리에 들었다고 해 통화를 못했다.

다음 날 이목희 의원이 환노위 소위에서 15차례나 회의를 거듭하며 분투해 결국 파견은 1년(1년 연장 가능) 뒤 고용의제, 기간제는 2년 뒤 고용의무로 합의했다. 이리하여 파견법과 기간제법은 2006년 국회를 통과, 2007년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비정규직 보호에 미흡하다며 노조는 두 법을 강력히 반대했고 학계의 평가도 부정적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평가가 올라갔다. 2007년 이후 비정규직 숫자가 줄어들었고, 처우도 약간 개선됐기 때문이다. 노조에서 강력히 요구했던 기간제 사용 사유제한은 포함되지 않았다. 노동부는 파견 가능 업종 32개를 나열하는 포지티브 리스트 방식에서, 8개만 빼고 몽땅 가능하게 하는 네거티브 리스트 방식으로 바꿀 계획을 세웠는데, 이목희 의원이 강력하게 반대해서 막았다. 자칫하면 온 천지가 파견 근로자로 가득 찬 이상한 나라가 될 뻔했으니 생각하면 아찔하다.

며칠 뒤 5월25일(수) 빔 콕 전 총리, 최영기 원장과 내가 부부 동반 점심식사를 했다(타워호텔 중식당). 1년 전 네덜란드 방문 때 초청을 수락해 방한한 빔 콕 전 총리는 전날 외국 원수들과 함께 한 청와대 만찬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노사정 대화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말했다. 그에게 한국의 노사정 지도자들에게도 사회적 대화의 중요성을 강조해달라고 부탁했다. 사실 당시는 노사정 대화가 복원될 좋은 기회였다.

2005년 4월5일 오후 서울 용산구 원효로 한국노총 회의실에서 이수호 민주노총 위원장, 김대환 노동부 장관, 이수영 한국경영자총협회장, 박용성 대한상공회의소장,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 김금수 노사정위원장(왼쪽부터)이 모여 8개월 만에 노사정대표자회의를 재개하고 있다. 노사정 대화의 새 틀을 짜려 했던 참여정부는 노동계와의 골이 깊어지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이수호 민주노총 위원장은 ‘사회적 대화’를 내걸고 당선된 데다 국어교사 시절 학생들에게 좋은 시를 한수씩 읽어주고 수업을 시작했던 낭만적 면모가 있었다.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은 유럽 동행 이후 친해졌는데, 유럽 견학 이후 이름난 투사에서 사회적 대화 신봉자로 바뀌어 있었다. 양대 노총 위원장이 대화가 가능한 사람들이어서 절호의 기회였는데도 사회적 대화의 큰 틀 합의에 이르지 못해 애석하고 통탄스럽다. 노동부와 노사정위원회의 상황 인식과 의지에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닌가 한다. 노사관계의 봄날은 언제쯤 올까.

필자 이정우: 1950년 대구에서 나고 자랐다. 1974년 서울대 경제학과 학·석사를 마친 뒤 1983년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2015년 경북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한 뒤 명예교수를 맡고 있다. 2003~05년 참여정부 초대 정책실장, 정책기획위원장 겸 정책특보를 지냈다.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자 끊임없이 공부하는 경제학자를 자임하고 있다. ‘참여정부 천일야화’ 제목은 그의 친필이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사설] ‘이태원 조작설’ 윤 대통령, 침묵으로 덮을 문제 아니다 1.

[사설] ‘이태원 조작설’ 윤 대통령, 침묵으로 덮을 문제 아니다

“이태원 참사 조작 가능성” 발언 논란, 윤 대통령 직접 해명해야 [사설] 2.

“이태원 참사 조작 가능성” 발언 논란, 윤 대통령 직접 해명해야 [사설]

말이 사라진 사회 [한겨레 프리즘] 3.

말이 사라진 사회 [한겨레 프리즘]

[사설] ‘세수펑크’ 조기경보 발령하며 감세 추진, 제정신인가 4.

[사설] ‘세수펑크’ 조기경보 발령하며 감세 추진, 제정신인가

스티그마 효과와 쿠팡 [유레카] 5.

스티그마 효과와 쿠팡 [유레카]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