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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시지프가 부조리를 이기는 법

등록 2023-09-25 18:48수정 2023-09-26 02:38

티치아노, ‘시시포스’(Sisyphus), 1548~1549, 캔버스에 유화, 237×216㎝,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티치아노, ‘시시포스’(Sisyphus), 1548~1549, 캔버스에 유화, 237×216㎝,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똑똑! 한국사회] 이주희 |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한 유령이 21세기 한국 사회를 떠돌고 있다―공산주의라는 유령이. 무려 4대에 걸쳐 권력의 세습을 준비하는 ‘봉건’적 전체주의 국가의 조선노동당과 민주적 선거를 통해 80%에 육박하는 지지로 당선된 당대표도 흔들어 떨어뜨리려는 의원들이 있는 살짝 부르주아 정당인 더불어민주당이 “공산전체주의”라는 부조리한 정체성을 공유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반면, 지난 대선 당시 한 언론 보도를 두고 “사형에 처해야 할 만큼의 국가 반역죄”라고 몰아붙이는 건 전체주의 국가를 연상시키고도 남는다. 망명 중 공산당 입당 경력 때문에 자신을 돌보지 않고 처절하게 식민세력과 싸운 위대한 독립운동가의 흉상을 육사에서 빼야 한다는 괴이한 주장도 지금을 기준으로 과거를 재단하려는 전체주의적 발상에 가깝다.

윤석열 정권의 수많은 퇴행을 보면, 시지프(시시포스)가 떠오른다. 민주주의를 간신히 정상에 올려놓았건만, 자꾸 굴러떨어지고 있다. 군대를 정치에서 몰아내니 검찰이 왔다. 국정농단으로 국민이 마음을 하나로 모아 시스템을 바꾸고자 했던 일이 불과 몇년 전 일이다. 그러나 국가의 시스템은 오히려 더 나빠져만 간다. 과거 실패한 이명박 정권의 장관들은 더 늙고 노회해져 귀환했다. 더 많은 의혹과 더 왜곡된 역사관을 지닌 다른 공직 후보들과 함께. 시지프는 살아 있기나 하지, 우리 사회에는 끝없는 노동을 되풀이하다 기계에 끼여 숨지고 끝없는 민원과 폭언 끝에 자살하는 이들이 줄을 잇는다.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삶이 살아갈 가치가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자살도 의식의 소멸을 통해 부조리를 무너뜨릴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끝까지 살아남아 그 척박한 땅의 괴상한 식생을 면밀하게 관찰하기”를 권한다. 카뮈에게 희망은 자살과 똑같은 삶의 회피이다. “내세에 대한 희망, 또는 삶에 초월적 의미를 부여했다가 그것을 배반해버리는 어떤 위대한 ‘이념’을 위해 사는 사람들의 속임수”다. 자살과 희망 대신 카뮈는 부조리를 명철하게 바라보며 고집스럽게 버티는 ‘저항’을 권한다.

일그러진 얼굴과 흙투성이 두 손으로 바위를 밀어 올리고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고통을 향해 다시 내려가는 그 남자가 보인다. 시지프는 그러나 자신의 비참한 조건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 그가 겪는 고통의 근원인 이 통찰력은 운명을 그의 것으로 만들고, 그에게 완전한 승리를 가져다준다. 인간이 자기 삶을 향해 되돌아가는 바로 그 미묘한 순간, 그는 운명보다 우위에 있다. 정상을 향한 투쟁 그 자체만으로도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울 수 있다.” 카뮈는 행복한 시지프를 상상했다.

시지프에게 가혹한 형벌을 가하는 신들의 바위는 현재의 우리를 가두고 제약하는, 식민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사회구조에 대한 은유일 수 있다. 해병대 채아무개 상병 순직 사건을 끝까지 놓지 않고 지키려 한 해병대 수사단장은 그런 희생을 통해 우리가 밀어 올려야 하는 바위에 미세한 균열을 일으켰다. 헌정사상 처음이라는 검사 탄핵 역시 그러리라 기대한다. 야당이 집권당과 야합해 국회를 무력화시키지 않는다면, 법원이 행정권력으로부터 독립된 원칙적이고 합리적인 결정을 내려준다면, 우리가 민주주의를 다시 복원하는 작업이 한결 수월해질 것이다.

영화 ‘어 퓨 굿 맨’에서 주목해야 할 장면은 제섭 대령(잭 니컬슨)과 풋내기 법무관 대니얼 캐피 중위(톰 크루즈)의 불꽃 튀는 법정 다툼이 아니라, 부당한 상관의 명령을 저항 없이 수행하다 동료를 죽음에 이르게 한 책임을 마침내 인정하고 자책하는 도슨 상병(울프갱 보디슨)의 눈물이다. 수많은 미세한 균열이 누적되면, 어떤 틈새가 발생하고, 어떤 역사적 우연과 함께 견고한 구조를 깨뜨릴 수 있다. 수없이 되풀이된 마찰 끝에 마침내 바위가 고운 모래로 바뀌고, 시지프가 그 위에 누워 피냐 콜라다를 마시는 모습을 그려본다. 귓가의 바람이 달콤하게 그를 감싼다. 행복한 상상이자, 미래의 필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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