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난도 보테로 ‘얼굴’, 2000년, 캔버스에 유채. 203×170㎝. 개인소장
지난달 15일 세상을 떠난 콜롬비아 출신 미술가 페르난도 보테로는 ‘뚱보를 그리는 작가’라는 말을 듣곤 했지만, 본인은 이 말을 싫어했다. 양감을 중시하다 보니 살찐 사람을 형상화하게 됐을 뿐이라고 그는 말했다. 보테로의 인물들은 아름답고 관능적이라는 평가가 많다. 하지만 그 오동통한 사람들이 현실 속으로 뛰쳐나온다면 어떨까. 아마 살 좀 빼라는 충고를 귀에서 피가 나도록 들어야 할 것이다.
군살 없이 늘씬한 여성을 미인의 기준으로 보는 시선은 19세기 말 서구에서 자리 잡았다. ‘다이어트의 역사’를 쓴 일본 작가 운노 히로시는 살빼기에 근대적, 미국적, 여성적 특성이 있다고 했다. 근대 이전 서구에서는 코르셋으로 만드는 잘록한 허리 정도가 강조됐을 뿐 살집 있는 풍만한 여성 신체를 선호했다. 시대가 바뀌면서 여성이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몸매 전체를 드러내는 쪽으로 패션이 바뀌면서 살빼기는 점점 여성의 의무가 됐다.(운노는 여성의 날씬한 몸매 추구가 남성 중심 사회의 시선을 반영한 것일 뿐만 아니라 여성이 코르셋을 벗어 던진 대가라고 보는데 정치적으로 올바른 해석인지 모르겠다) 의학적으로는 근대적 영양학이 발달하면서 살빼기가 건강 관리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게 됐다. 특히 미국에서 비만을 나태함과 연결하는 도덕관이 19세기 후반 확립되어 다이어트 산업이 크게 발달했다.
서구의 영향을 받은 한반도에는 1920년대에 이미 살을 둘러싼 사회적 강박이 나타난다. 그 시대 신문기사들을 보면, 과학화와 표준화를 향해 내달리던 당대 분위기를 반영하듯 ‘표준 체중’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1920~60년대 다이어트가 세계 여성의 공통적인 의무처럼 자리잡을 때 외국의 ‘뚱보’ 소식이나 최신 다이어트 정보는 한국 신문 해외토픽난의 단골 주제였다. 1980~90년대 소비문화가 심화하면서 살빼기는 국민적 관심사로 부상한다. 1995년 에스비에스(SBS) 다큐멘터리 ‘육체와의 전쟁’은 신호탄이었다. 체중을 118㎏에서 55㎏으로 감량한 수잔 파우터의 다이어트법은 한국에서도 ‘대박’을 터트렸다. 국제통화기금(IMF) 긴급 구제금융 사태로 나라 경제가 꽁꽁 얼어붙던 때, 다이어트 시장엔 불이 붙었다. 1998년 슈퍼모델 이소라의 다이어트 비디오는 출시 10개월 만에 33만장을 판매하는 기염을 토했다. ‘조혜련의 다이어트 댄스’ ‘변정수의 아름다운 몸매만들기’ 같은 ‘홈트’ 비디오가 판매 인기순위를 다퉜고 ‘차승원의 체험 다이어트 25시’ 같은 남성 스타의 비디오도 눈길을 끌었다. 이 또한 ‘매력적인 남자와의 즐거운 다이어트’를 강조해 여성 타깃을 분명히 했다.
2004년 8월 경기 가평 서울시교육연수원에서 ‘여름방학 튼튼이 캠프’에 참가한 어린이들이 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 연예산업은 체중 감량을 정상화하는 이데올로기를 공고히 한다. 1980년대 후반부터 방송사에선 ‘재미’로 여자 가수의 몸무게를 측정해 공개하곤 했다. ‘공영방송’ 한국방송(KBS)은 2016년 설특집 프로그램에서 여자 아이돌의 체중을 당사자 동의없이 몰래 측정해 공개했다가 맹비난을 받았다. 케이팝 아이돌 스타들은 일상적으로 ‘식단’이라 일컫는 초절식을 하면서 매니저 앞에서 몸무게를 달았다. 식욕억제제를 먹고 쓰러지거나 응급실에 갔다는 아이돌 출신들의 후일담도, 여자 가수를 두고 살이 쪘네 빠졌네 하는 소란도 끊이지 않는다. 여자 아이돌의 체중공식은 키(㎝)에서 몸무게(㎏)를 뺀 ‘키빼몸’ 120인데, 거식증을 찬성하는 ‘프로아나’의 최종 목표도 이와 동일하다. 세계적으로 한국 케이팝 스타들의 극단적으로 마른 몸매는 낙수효과를 통해 성장기 어린아이들에게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우려가 나온다.
패션산업은 체중 관리를 더욱 부추긴다. 5주 동안 물만 마셨다는 등 패션모델의 혹독한 다이어트는 상상을 초월한다. 인터넷에서 ‘살집’이란 말을 검색하면 “옷은 예쁘지만 제가 살집이 있어서 어울리지 않네요”라는 쇼핑몰 후기들이 적잖게 눈에 띈다. 옷이 아니라 내 몸이 문제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2017년 여성환경연대가 의류브랜드 31곳을 조사한 결과, 가장 작은 엑스스몰(XS) 사이즈부터 가장 대형 치수인 투엑스라지(XXL)까지 사이즈를 두루 갖춘 브랜드는 단 1곳뿐인 것으로 조사돼 ‘여성이 마네킹이냐’는 비판이 나왔다.
비만 진단 자체가 너무 엄격하다는 목소리도 있다. 의학적으로 비만 진단 기준은 1830년대 벨기에 천문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랑베르 아돌프 자크 케틀레가 발명한, 몸무게(㎏)를 키(m)의 제곱으로 나눈 체질량지수(BMI)를 이용한다. 하지만 이 지수는 인종, 성별, 연령, 체질, 유전요인, 환경 등을 고려하지 않은데다 기준이 모호해 현실과 거리가 멀다는 비판도 함께 받아 왔다. 한국 성인여성 평균 키 160㎝로 계산할 때 BMI 평균 몸무게는 53.8㎏이다. 이것도 날씬한데 인터넷에 떠도는 ‘미용체중표’를 보면, 같은 키에 몸무게는 47.4㎏이 돼야 한다.
‘몸 긍정주의’를 강조해온 미국 가수 리조. 그 또한 계속 다이어트와 몸무게 논란에 휩싸였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살찐 사람을 차별하고 불평등하게 대우하는 ‘비만 낙인’은 많은 사람이 피부로 느끼는 바다. 2023년 대한비만학회가 올 3월 전국 만20~59살 인구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10명 중 6명(61%)이 ‘우리 사회가 비만이라는 이유로 무시하고 차별하는 경향이 있다’고 답했다. 성별로 보면 여성은 71%, 남성은 52%가 그렇다고 대답해 여성이 남성보다 비만 낙인과 차별을 더 크게 경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1년 과체중 직원에게 체중 감량을 지시하고 실패할 때 사직서를 제출하라고 한 어느 기업에 국가인권위원회가 차별행위라고 판단 내렸다. 최근에도 한 중견기업 창업주가 일부 직원에게 살을 빼라 지시하고 주기적으로 체중을 점검하며 체중 감량 우수 직원에게는 따로 밥을 사고 그렇지 못한 직원에게는 경고 조치한 사실을 고용노동부가 적발하기도 했다.
비만 낙인은 비행기에 탑승할 때 특히 예민한 문제가 된다. 항공사들은 비행 전 승객 몸무게 측정이 항공안전에 필수적인 조치라고 항변하지만, 살이 찐 사람들에게 추가 좌석 구매를 요구하거나 탑승을 거부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덩치 큰 미국 여성작가 오브리 고든은 ‘우리가 살에 관해 말하지 않는 것들’에서 비행기 이코노미클래스를 탔을 때 옆자리 남자에게서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한 뒤 가족을 만나거나 출장을 가는 일을 피하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자기 몸 긍정주의’(body positivity)가 유행하지만 고든은 이 운동이 뚱뚱한 몸에 대한 제도적 차별이나 대인관계의 학대를 바꾸는 데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고 본다. ‘당신의 몸을 사랑하라’는 슬로건은 결국 자기 몸을 자기가 탓한다는 점을 전제로 하며 공적인 차별을 시정하라는 요구로 이어지지도 않았다.
페르난도 보테로 ‘담배 피우는 여자’, 1987.
살빼기는 거대한 산업이다. 최근 국제 주식시장은 비만치료제 이야기로 한층 뜨겁게 달아올랐다. 지난달 4일(현지시각) 덴마크 제약사 노보 노디스크의 시가총액이 4280억달러(약 566조원)으로 세계 최대 패션명품 기업인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를 제치고 유럽 증시 1위에 오른 것이다. 기적의 비만치료제라는 ‘위고비’ 덕분이었다. 모건스탠리는 비만치료제 시장규모가 2030년 540억달러(70조원)에 이를 것이라고 내다봤지만 이 예측은 틀릴 것이 틀림없다. 이 거대 산업은 인류의 체중과 몸집을 줄여 자신의 뱃속을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불리고 있다.
진정 인류가 모두의 건강을 위해 해야 하는 일은 뭘까. 지난 5월 미국 뉴욕시는 키와 몸무게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는 조례를 확정했다. 미국 심리학자 러네이 엥겔른은 몸을 둘러싼 메시지 공해에 주목하고 몸을 논평하는 ‘바디토크’를 당장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살 이야기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외모를 점검하게 하기 때문이다.
올 추석에도 많은 사람이 오랜만에 만나는 상대방의 살을 두고 평판과 충고를 서슴지 않았다. 1998년 다이어트 비디오에서 모델 이소라는 “거울 앞에 설 때마다 당당해질 수 있는 자신을 생각하라”고 주문을 걸었다. 엥겔른은 우리가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이제는 거울 앞에서 돌아서서 세상으로 눈을 돌리자고 말한다. 살면서 거울을 아예 안 보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내 앞에 있는 사람의 전신 거울이 되어 건강을 걱정해주는 척하는 오지랖만큼은 이제 그만둘 때가 된 것 같다.
이유진
한겨레21 선임기자. 한겨레 편집국 문화부, 편집부, 사회부 기자를 거쳐 책지성팀장과 토요판 부장을 지냈다. 대학원에서 여성학과 문화학을 공부했고 감염병과 주부주체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지성이 금지된 곳에서 깨어날 때’가 있고, ‘엄마도 아프다’ ‘종이약국’을 다른 필자들과 함께 썼다. ‘바디올로지’는 ‘몸(body)’과 ‘학(-logy)’의 합성어로, 지난 100년 동안 미디어를 통해 유포된 몸 담론을 씨앗으로 전쟁터나 다름없는 몸과 젠더, 장애, 노화 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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