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빨 연구의 선구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빨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 음식을 잘게 부수는 것에 있다고 했지만, 이빨은 싸우다가 여차하면 무는 데도 유용하다. ‘이빨 빠진 호랑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 이빨은 싸움에서도 중요한 무기가 된다.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건 짐승이나 인간이나 비슷하다. 최근 에미상 8개 부문 상을 받아 재조명되고 있는 넷플릭스 드라마 ‘성난 사람들: 비프’(2023)에서 주인공 에이미와 대니는 서로 이를 갈면서 집요하게 공격한다. 그들은 백인 중심 사회에서 이 악물고 살아가는 동양계 미국인들이다. 이렇게 피곤하게 사는 사람들의 치아는 성할 수 없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위산이 역류하고, 이가 녹아내린다. 이빨에는 생의 흔적이 남는다. 나무의 나이테처럼 동물의 이빨에는 성장선이 있어 영양이나 질병 같은 정보가 새겨진다. 19세기 박물학자 조르주 퀴비에는 “당신의 치아를 보여주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주겠다”고 말했다.
유인원의 수컷은 암컷보다 송곳니가 큰데, 찰스 다윈은 짝짓기 경쟁에서 진화한 결과라고 본다. 인간의 송곳니가 짧고 충분히 뾰족하지 않은 것은 짝짓기 경쟁 과정에서 서로 물지 않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어쩌면 인간의 송곳니가 발달하지 않은 건 인간 싸움이 물리적인 깨물기에서 언어로 물어뜯는 방식, 곧 ‘이빨까기’로 변했기 때문 아닐까. 이것도 진화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인간의 치아도 크고 단단해 보일 때 공포감을 더한다. 영화 007시리즈 ‘나를 사랑한 스파이’에 등장하는 악당 ‘죠스’는 총알도 튕겨내는 강철 치아를 가졌다. 영화 ‘나 홀로 집에’에 나오는 도둑은 번쩍이는 송곳니로 아이를 위협했다. 드라큘라·뱀파이어·좀비의 송곳니는 비인간 괴물의 상징이며, 물리면 인간 아닌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잠재적 공포를 선사한다.
빠짐없는 치아는 건강한 성인의 정상성을 나타낸다. ‘이빨 빠진 갈가리’는 지나치게 귀엽고, 앞니 없는 노인은 선량한 한편 음흉해 보인다. ‘원 펀치 쓰리 강냉이’란 말처럼 치아는 승자의 전리품이지만, 상대에게 얻어터져 치아를 잃는 것은 커다란 치욕이다. 그래서 인간은 손상된 이를 그대로 두려 하지 않았다. 치아가 없으면 그 자리에 더 번쩍거리는 것을 해 넣었다. 영화 ‘올드보이’에서 철웅(오달수)은 오대수(최민식)에게 잡혀 이빨이 몽땅 뽑히지만 이후 금니를 하고 다시 공포스럽게 나타난다.
1920년대 미국 유명인들 사이에선 금니 대신 다이아몬드를 박는 일이 유행이었다. 1980년대 미국 힙합 아티스트들은 부와 힘을 과시하려고 치아에 보석으로 만든 틀니의 일종인 그릴즈(grillz)를 착용하기 시작했다. 뉴욕 브루클린 흑인 거주지역 등에서 가난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미흡한 구강관리로 치아를 잃게 된 뒤 치아 대용으로 쓰기 시작한 것이 시초였다. 2020년대 들어서는 엠제트(MZ) 세대 사이에서 치아에 보석을 붙이는 투스젬(toothgem)이 성별을 가리지 않고 유행했다.
치아의 심미적 기능은 현대에 이르러 더욱 중요해졌다. 웃음을 통제했던 중세와 근대 초기 여성들은 입을 가리고 웃어야 했다. 오늘날 ‘소셜식스’(social six)라고 일컫는 여섯개의 앞니는 첫인상을 좌우하며 대인관계에서 자신감의 기준이 된다. ‘건치 미인’의 이상적인 앞니는 적당히 부풀고(풍융도), 각도, 크기까지 완벽하게 어우러져야 한다.
현대적 미소의 설계자는 미국 치아산업이다. 이들은 의과에서 치과를 분리해 발달시켰고 활짝 웃는 ‘할리우드 미소’를 만들었다. 미국식 미소는 미백, 접착, 라미네이트 등 치과기술을 발전시켰고 치의학계는 대중문화, 패션, 마케팅과 손을 잡았다.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치아를 활짝 드러낸 할리우드 미소로 신자유주의라는 종교를 세계에 전파했다. 1982년 미국 연방대법원은 의료광고 규제를 풀었고, 고삐 풀린 의료화 산업은 날개를 달았다. 성형과 미용치과 붐이 시작되었으며 미국식 치아관리는 미소의 대중화, 세계화를 이루었다.
미인대회 무대에 도열한 여성들 가운데 가지런한 치열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은 없다. 하얗고 깔끔한 치아는 ‘용모단정’한 사원의 필수조건이 되었고 평생 남는 졸업사진을 찍는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치아 교정은 2차 성징처럼, 10대들이 성인으로 가는 길목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 된 지 오래다. 킹카에게 늘 차이던 추녀 고등학생이 치아교정기를 뗀 뒤 완벽한 미인이 되어 짠하고 나타나는 전형적인 드라마를 떠올려 보라. 멀쩡한 치아를 뽑거나 깎고 치아 교정으로 튀어나온 이를 집어넣고 잇몸을 축소하며 턱관절을 작고 예쁘게 만드는 것은 미국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대학 입학 전 완성해야 할 신체관리법이다. 고르게 배열되고 적절히 통통하며 새하얀 치아는 그 사람의 재력과 사회적 지위를 한눈에 드러낸다. 치아성형은 얼굴성형이나 지방흡입과 비슷한 형태로 일반적인 신체 자기계발의 일부가 되었다.
치아성형은 고사하고 충치치료조차 힘든 사람들도 널렸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치아는 점점 불평등한 인체 자원으로 변했다. 인류가 충치를 갖게 된 건 농업 발명이 이뤄진 신석기 혁명 이후, 탄수화물 섭취량이 급증하면서였다. 설탕이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한 19~20세기 충치가 전염병처럼 번졌다. 누구나 설탕과 탄수화물을 즐기게 됐지만 치과치료는 여전히 쉽지 않았다. 예컨대 미국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백인 치과에 오랫동안 갈 수 없었다. 시인 마야 안젤루는 자신이 할머니와 백인 치과의사를 찾아간 일화를 남겼다. 치과의사는 손녀를 봐달라는 할머니에게 말했다. “검둥이 입에 손을 넣느니 차라리 개 입에 손을 넣지.”
장애인이나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하루 서너번 칫솔질이 용이하지 않고 치과에 가기도 어렵다. 보건복지부와 질병관리청의 ‘2019 국민건강통계’를 보면, 19살 이상 성인 중 상위 20% 중 돈이 없어서 치과치료를 받지 못하는 경우는 2.1%인데, 소득 하위 20%에서는 그 비중이 13.2%에 달했다. 소득수준에 따른 구강건강 불평등이 점점 확대되고 있다는 최근 연구도 여럿이다.
아동의 경우는 영구치를 빨리 잃을 수 있어 더 큰 문제다. 질병관리청의 ‘2021~2022년 아동 구강건강 실태조사’를 치아건강시민연대가 분석한 결과, ‘한개 이상 치료되지 않은 충치를 가진 아동 비율’(영구치우식유병률)은 주관적 소득수준 인식을 상·중·하로 나누었을 때 ‘상’ 집단이 5.6%였던 데 반해 ‘하’ 집단은 두배가 넘는 12.4%였다. 아동 구강건강을 위한 보편적 의료서비스인 ‘아동치과주치의 사업’은 고소득층이 저소득층보다 더 많이 이용했다.
최근 현직 치과의사가 쓴 책이 화제가 되었다. ‘임플란트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할 이유’라는 책을 펴낸 김광수 박사는 상업적 경영과 영리추구에만 매몰된 치과에 ‘실장’이 상주하며 이익을 더 내기 위해 과잉진료를 한다고 비판했다. 한국 치과기술이 세계 최고라는 인터넷 게시물엔 어김없이 댓글이 달린다. “과잉진료도 최고지.” 돈 안되는 증상 치료나 저렴한 재료를 활용한 처치는 푸대접 받고, 과거 의학적 문제가 아니었던 증상들을 이제는 큰 질병이나 질환으로 간주해 ‘의료화’하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지금도 빈곤 노인들은 돌팔이에게 치아를 맡기고, 돈과 정보, 시간이 없는 부모를 둔 아이들의 영구치는 점점 허물어지고 있다. 치아건강의 공공성 확보는 먹는 행복감, 신체 건강 전체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미국에서는 구강관리 정책에 공공성을 입히려던 뜻있는 의료인들의 기획이 일찌감치 색깔론에 부닥쳐 좌절된 바 있다. 그나마 한국에서는 구강건강 공공성 확보를 위한 치과의사들의 노력이 꾸준히 이어져 다행이다. 이들을 지지하고 응원한다.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행복은 다른 이와 함께할 때 더욱 커질 것이다.
※참고자료: ‘아 해보세요’(메리 오토 지음, 한동현·이동정·이정옥 옮김, 후마니타스) ‘이빨’(피터 S. 엉거 지음, 노승영 옮김, 교유서가) ‘한겨레21’ 1491호, ‘아아아…썩은 열살 ‘치아’가 여든 간다’(서혜미) ‘임플란트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할 이유’(김광수 지음, 도서출판 말)
이유진
한겨레21 선임기자. 한겨레 편집국 문화부, 편집부, 사회부 기자를 거쳐 책지성팀장과 토요판 부장을 지냈다. 대학원에서 여성학과 문화학을 공부했고 감염병과 주부주체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지성이 금지된 곳에서 깨어날 때’가 있고, ‘엄마도 아프다’ ‘종이약국’을 다른 필자들과 함께 썼다. ‘바디올로지’는 ‘몸(body)’과 ‘학(-logy)’의 합성어로, 지난 100년 동안 미디어를 통해 유포된 몸 담론을 씨앗으로 전쟁터나 다름없는 몸과 젠더, 장애, 노화 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