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8월24일 정부세종청사에서 2024년 예산안 및 2023~2027년 국가재정운용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시민편집인의 눈] 제정임 |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장
마음 있는 데에 돈이 간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곧잘 ‘네가 필요하다면 뭐든 다 해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된다. 부모는 구멍 난 양말을 신으면서도, 아이의 장래를 위해서는 목돈을 쏟아붓기도 한다.
나라 살림도 마찬가지다.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라고 판단하면 그 사업에 돈을 몰아준다. 그래서 국회에 제출된 예산안을 살펴보면 정부가 무엇을 중히 여기며, 어떤 나라를 만들려는지 알 수 있다. 기후위기 대응, 불평등 완화, 저출생 개선, 지역소멸 대응, 기술혁신 지원 등 시대적 과제에 윤석열 정부가 얼마나 진심인지 2024년 예산안을 보면 확인할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윤석열 대통령이 유엔 연설 등에서 공언한 ‘기후위기 대처 선도’는 예산으로 뒷받침되지 않는다. 여러 언론 보도를 보면, 정부는 내년 기후대응 예산을 ‘탄소중립 기본계획’으로 공표한 규모에 비해 약 16%나 줄였다. 화석연료 대신 재생에너지 중심으로 에너지 전환을 서둘러야 하지만, 산업통상자원부의 재생에너지 지원 예산은 올해보다 약 42% 줄었다. 기후재난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포항 지하주차장과 오송 지하차도 참사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대비하는 ‘국민생활안전 긴급대응 연구사업’ 예산은 약 90% 삭감됐다. ‘안전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약속은 말에 그치고 있다.
정부는 이번 예산안에서 ‘약자 복지를 강화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노인 일자리와 기초연금, 기초생활보장제가 개선된 것 외에는 여러 곳에서 후퇴가 엿보인다. 실업급여 예산이 2700억원가량 줄여 편성됐고, 소규모 사업장에 사회보험료를 지원하는 두루누리사업도 2400억원가량 삭감됐다. 저소득 구직자를 대상으로 하는 ‘국민취업지원 제도’ 대상자도 47만명에서 30만8천명으로 줄였다. 공공 보육과 요양을 담당하는 각 시·도 사회서비스원은 예산이 통째로 삭감됐다. 고용노동부 ‘중증장애인 지역맞춤형 취업 지원 사업’도 예산이 전액 깎여 종사자들이 실직 위기에 놓였다. 인력난 해소를 위해 외국인 고용허가를 늘리기로 했는데, 이들의 정착을 돕는 외국인노동자지원센터는 예산이 끊긴다. 이주노동자의 인권·노동권을 보호할 대책 없이 수만 늘리는 정책이 어떤 사달을 낳을지 걱정스럽다.
저출생 추세에 근본적으로 대응하려는 의지도 이번 예산안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국내외 전문가들은 한국 저출생의 핵심 원인 중 하나가 성별 임금격차, 가사·육아 부담 등 직장과 가정에 여전한 성차별이라고 지적한다. 그런데 이를 개선하기 위해 노동부 등 8개 부처에 설치한 양성평등정책담당관 소관 예산은 이번에 많게는 절반까지 삭감됐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방시대 선포식’까지 열며 의지를 밝힌 지역소멸 대응은 어떤가. 세수 감소로 지방교부세와 교부금도 대규모로 삭감돼 지방자치단체들의 살림은 더욱 어려워지게 됐다. 비수도권을 위한 균형발전특별회계의 연구개발(R&D) 예산도 70% 가까이 감액됐다. 기술혁신으로 국제 경쟁력을 높이려면 기초과학 등의 연구개발 지원이 중요한데, 국가 전체 연구개발 예산은 16%가 삭감됐다. 일자리를 잃게 될 젊은 연구자들이 동요하고 있다. 반면 ‘대통령이 미는’ 원전 관련 연구 중에는 예산이 780% 늘어난 사업이 있고, 대통령실 업무지원비 등과 ‘선심성’ 시비가 있는 사회간접자본(SOC) 예산 등은 증액 편성됐다.
한겨레는 예산안에 담긴 이런 문제들을 어느 언론보다 열심히 찾아내고 충실히 보도하고 있다. 다만 분야별로 조각조각 보도가 이어져, 나라 살림의 전모를 전달하는 데는 아쉬움이 있다. 대기업과 부유층을 위해 법인세, 종합부동산세 등을 깎아준 뒤 세수 부족을 이유로 예산에 칼질하는 것이 옳은지부터, 줄이고 늘린 예산에 합당한 명분이 있는지까지 종합적으로 따져볼 필요가 있다. 길어지는 중국 경제 침체를 포함해 국내외 시장 여건이 험난한데, 정부가 ‘긴축’을 외치는 것이 맞는지도 물어야 한다. 각 분야 예산안이 국민의 일상에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 설명도 조금 더 친절하게 해주면 좋겠다. 예산철 내내 심층 연재를 통해 ‘이 예산안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일목요연하게 알려준다면 바람직하겠다. 국민이 예산안을 제대로 이해하는 일은, 국회의 분발을 불러 나라 살림 계획의 궤도를 바로잡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