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 한국사회] 조기현 | 작가
“오늘부터 보육 사업이 3개나 시작돼요. 이렇게 바쁜데 교육도 받아야 해서 정말 짜증 났어요. 그런데 작가님 강의 들으니 대상자의 삶을 돌아보는 기회가 됐어요. 주민센터에 찾아오는 분들의 이야기를 좀 더 세심히 들어야겠다 싶어요.”
얼마 전 사회복지 공무원들 대상 강연을 마친 뒤 듣게 된 후기였다. 주민센터에서 복지 상담 업무를 하는 공무원의 말이었기에 뿌듯하고 든든했다. 상담 창구 너머의 생애를 조금이라도 먼저 읽어주길, 받을 수 있는 복지를 물으러 온 이에게 ‘없습니다’라는 단답형으로 상담을 끝내지 않길, 힘들 때 주민센터에 와서 힘들다고 말하는 게 낙인이 되지 않게 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준비한 강연이었다.
강연을 준비하는 내내 떠올린 사람이 있다. 혹시나 강연에서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들었다. 만나면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은 이였다. 몇해 전 주민센터에서 만난 사회복지 공무원이었다.
20대 내내 아버지를 돌보며 생계비와 병원비에 휘청거렸지만, 주민센터에서는 늘 2인가구 중위소득을 넘긴다는 이유로 신청할 수 있는 복지서비스가 없다는 말을 듣기 일쑤였다. 치매가 시작된 아버지를 혼자 두고 돈 벌러 집을 나서는 것도, 이것저것 어질러진 집에 들어가는 것도 지옥이었다. 정말 죽을 거 같아서, 마지막이다 싶은 마음으로 찾아간 주민센터에서 그를 만났다.
복지 상담 창구에서 그는 ‘받을 수 있는 게 없다’고 말했다. 상담을 마치고 문밖을 나서는데 그가 따라 나왔다. 그러고는 복지 혜택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줬다. 그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몰랐을 정보였다. 그 덕에 아버지는 기초생활수급자가 될 수 있었고, 나 혼자 다 짊어졌던 생계비나 의료비 부담을 어느 정도 덜어낼 수 있었다.
더 나은 복지제도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는 그저 부차적인 소리로 들릴지도 모른다. 나를 살려준 공무원도, 후기를 들려준 공무원도 자신의 ‘선의’에 기대고 있으니 말이다. 공무원 개개인의 선의가 복지 사각지대를 줄인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나 또한 선의를 어떻게 제도화할지 고민하게 된다.
나는 선의가 역량으로 발휘될 수 있도록 한 시도가 지난 정부에서 시행했던 ‘지역사회 통합돌봄’이라고 생각한다. 지역사회 통합돌봄은 2019~2022년 전국 16개 시·군·구에서 선도사업을 추진했다. 당시 선도사업을 추진했던 담당 공무원들은 이전과 다른, 새로운 경험을 했다.
담당자들은 대상자의 집을 방문해 필요한 바를 조사하고, 조사한 사례를 두고 일상적으로 필요한 지원을 추가해 나갔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위에서 내려온 지침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침이 없는 상태에서 사업을 시행하니 주민들의 필요를 세심히 알아야 하고, 주민을 직접 만나는 복지관 등 민간과 수평적으로 협력하는 파트너가 돼야 한다. 담당 공무원들은 그렇게 일하며 지역의 사각지대가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몸으로 체감했다. 그런 지역사회 통합돌봄은 2026년까지 전국으로 확대될 예정이었으나, 올해 예산이 축소되면서 유명무실해졌다. 하지만 지난 4년 동안의 경험을 돌아보더라도 이대로 사라지면 안 되는 정책이다.
한국의 돌봄서비스는 지나치게 중앙집권적이다. 복지 사업의 70%가 기초지자체를 통해 시민들에게 전달되지만, 중앙정부의 지침과 통제 아래에 있어 일선 공무원들이 알아서 통합하고 연계하기 어렵다. 몇해 전 집계한 돌봄서비스 개수만 260개가 넘는다. 현장에서 이 모든 걸 다 숙지하는 것도 불가능에 가깝다.
중앙집권적이면서도 파편적인 돌봄서비스는 책임을 회피하는 구조를 만든다. 중앙정부는 돌봄서비스가 시민의 삶에 어떻게 가닿는지 고민하지 않고, 지자체는 지침에 따라 형식적으로 집행하게 된다. 예산은 예산대로 쓰는데 실제 우리 삶이 나아지는 정도는 더딘 이유다. 지역에서 돌봄을 통합한다는 건 시민에게는 물론, 일선 공무원에게도 좋은 일이다. 그들의 선의가 역량이 되는 구조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