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8월15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열린 제78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세상읽기] 윤홍식|인하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소셜코리아 운영위원장
우리가 민주화를 이루고 선진국이 된 것이 맞나? 선거를 통한 평화적 정권교체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그렇다. 1987년 민주화 이후 국민은 민주적 선거를 통해 네차례나 평화적으로 정권을 교체했으니 선진국이 된 게 맞다.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2017년에 이미 3만달러를 넘어, 남유럽 국가보다 높아졌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2021년 만장일치로 한국의 지위를 선진국으로 변경했다.
이상한 일은 민주화를 이루고 선진국이 되었다는데도, 이 나라가 민주사회라는 믿음도, 국민이 안락한 삶을 누린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민주화 이후 거대한 백래시가 수십년간 진행되어왔다”는 신진욱 교수의 주장이 설득력 있게 들리는 이유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거대한 백래시(반동)”는 지금 우리가 직면한 위기의 현상이지 원인이 아니다. 사회적 의미로 쓰일 때 백래시는 “사회경제적 진보와 변화를 뒤로 되돌리려는 “대중”의 집단적 반발”을 의미한다. 민주화 이후 백래시를 보수 엘리트의 조잡한 이념과 무능력 때문이라고만 치부할 수 없는 이유이다. 민주화 이후 보수의 백래시가 거대해진 것은 보수의 조잡한 이념과 선동에 “대중의 상당수”가 동의했기 때문이다.
파행적 외교, 채 상병 사망사건 수사 외압 의혹, 극우 편중 인사 등 비상식적 국정운영이 일상화되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현 정권에 비판적이라는 이유로 협치의 주체인 야당과 시민사회를 체제전복 세력으로 규정하고 노골적으로 집회결사와 언론의 자유를 위협하고 있다. 경제는 민주화 이후 최악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못 살겠다는 아우성들이 넘쳐난다. 하지만 국민은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와 달리 ‘못 살겠다, 갈아보자’며 광장으로 나오지 않고 있다. 바로 이러한 현실이 윤석열 정권이 진보개혁 세력을 악마화하며 극우 정치로 달려가는 동력일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은 윤석열 정권의 민생 외면과 퇴행적 정치에 왜 국민이 침묵하고 있냐는 것이다. 더 나아가 국민의 30~40%는 여전히 윤석열 정권이 잘하고 있다 생각한다. 한국갤럽이 발표한 민주화 이후 역대 대통령의 집권 2년차 2분기 직무수행 평가를 보라. 윤석열 대통령이 ‘잘하고 있다’고 응답한 비율(34%)은 노태우(28%), 이명박(27%) 전 대통령보다 높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같다. 당황스러운 결과다.
무엇이 잘못됐을까? 크게 두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민주화 세력이 훈장처럼 달고 있는 87년 민주화의 한계이다. 87년 민주화는 한국 사회의 거대한 성취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87년 민주화는 권위주의 세력을 해체하지 못했다. 민주화는 권위주의 세력과 제도권 야당(현재 국민의힘 일부와 더불어민주당)의 거래와 타협에 의한 ‘불철저한’ 민주화였다.
그 결과 광복 이후 친일파가 정치적 기득권을 온전히 유지했던 것처럼, 민주화 이후에도 권위주의 세력은 독재 시기에 쌓아 올렸던 정치적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았다. 여기에 제도권 야당과 사회경제적 엘리트의 특권이 더해지면서, 우리 사회는 다양한 국민의 이해를 대변하는 대의제도를 만드는 데 실패했다.
다른 하나는 첫번째의 결과이다. 민주화가 권위주의 세력과 제도권 야당의 경쟁 구도로 재편되면서, 정치적 민주화가 사회경제적 민주화로 나아가지 못했다. 민주화 이후 경제는 중진국 함정에 빠지지 않고 선진국으로 도약했다. 국민 대다수도 살림살이가 나아졌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평범한 국민은 성장의 성과를 온전히 공유하지 못했다.
불평등이 소득에서 자산으로, 다시 건강, 교육, 주거, 젠더 등 다양한 차원으로 확대되면서, 한국 사회는 부모가 자녀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능력”을 결정하는 세습자본주의, 세습능력주의 사회가 되었다. 많은 국민이 정권교체에 냉소적이고, 민주주의의 퇴행에 침묵하는 이유이자 윤석열 대통령이 ‘진보·개혁 세력이 이 시대의 가장 큰 재앙’이라고 국민을 설득하는 근거이다.
현실을 직시하자. 지금 우리가 직면한 ‘거대한 백래시’는 점점 더 불평등해지는 현실에 대한 민중의 소리 없는 분노이자 비명이다. 백래시에 대한 반격을 국민의 다양한 이해를 대표하는 비례대표제 확대를 포함해 다원적인 정치 질서를 제도화하고 복지 확대와 노동권 강화 등 민생을 보듬는 정치를 실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