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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우월한 체제에 살고 싶다 [세상읽기]

등록 2023-10-24 09:00수정 2023-10-24 09:10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26일 성남 서울공항에서 열린 건군 제75주년 국군의 날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26일 성남 서울공항에서 열린 건군 제75주년 국군의 날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한승훈ㅣ한국학중앙연구원 종교학전공 교수

가끔 필자가 속한 세대를 둘러싼 역사적 조건을 생각해 본다. 내가 ‘국민학교’를 졸업하던 해, 초등교육기관 명칭은 ‘초등학교’로 바뀌었다. ‘황국신민을 양성하는 학교’라는 의미의 ‘일제 잔재’를 청산한다는 명분이었다. 그러나 그 시기의 10대들이 실제로 경험한 것은 식민지콤플렉스의 청산에 가까웠다. 이 세대에게 일본은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잘 만들지만, 가끔 극우 정치인이 과거사와 관련해 망언을 하는 조금 특이한 외국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니 뉴라이트 세계관으로 의식화된 정치인들이 한국인은 여전히 반일종족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훈계를 늘어놓곤 하면 이제 와서 무슨 소리를 하고 있냐고 되묻고 싶어진다.

‘마지막 국민학생’들은 이전 세대에 비해 레드콤플렉스로부터도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유년기에 반공교육의 흔적 같은 것을 경험하긴 했지만, 청소년이 되었을 때 이미 냉전은 끝나 있었고, 한국은 제법 선진국이었고, 북한 사람들은 굶주리고 있었다. 북한이 무력으로 우리 사회를 위협할 것이라는 공포에도, 통일된 민족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열정에도 쉽게 공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북한은 가난한 독재국가지만 가끔 문제를 일으키니 관리해야 하는 조금 곤란한 외국 가운데 하나로 체험되었다.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콤플렉스는 사유와 행동의 자유를 제한한다. 20세기 한국을 지배해 온 식민지콤플렉스와 레드콤플렉스가 힘을 잃어가면서, 우리는 과거사를 격한 감정보다는 비평적인 시선에서 회고하기 시작했다. 현실 분석도, 미래 전망도 마찬가지다. 특정한 세계관의 교의와 금기를 절대화할 필요가 없다면 선택지가 늘어난다. 절대로 하면 안 되거나 무조건 해야 하는 일이 없으니 토론을 해도 말이 통한다. 한 사회가 누리는 자유의 확대란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 했다.

설마 2020년대가 되어 집권 세력이 나서서 “공산전체주의”를 상대로 이념 전쟁을 하자고 부르짖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반일종족주의에서 벗어나자면서 사회주의·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을 집단기억에서 제거하려는 투쟁도 기괴하다. 최근 온라인으로 업데이트를 마친 우리 집 컴퓨터 운영체제를 업그레이드해주겠다며 5.25인치 플로피디스크를 한다발 가져와서는 현관문을 두들기고 있는 괴인의 외침을 듣는 듯한 형국이다.

1960년 김수영은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 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김일성 만세’)라고 썼다. 이유는 간단하다. 통치자의 지배 이념과 어긋나는 사람들을 모조리 숙청하는 체제보다는 가장 위험해 보이는 사상까지 내버려 둬도 붕괴하지 않는 체제가 훨씬 우월하고 건강하며, 그것이 바로 자유주의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나는 가톨릭 교황이 된다면 먼저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을 성인으로 지정할 것이다. 그래야만 스스로를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포괄하는 진정한 보편 교회라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냉전은 한세대 이전에 이미 끝났다. 북한은 더 이상 체제 경쟁 대상이 아니다. 약 한달 전, 서울 시내에서는 10년 만에 재개된 국군의날 시가행진이 있었다. 각 군의 최신 무기체계를 시위하는 대규모 퍼레이드는 과거에도 있었지만, 최근의 여러 맥락이 이 행사를 우스꽝스럽게 만들고 말았다. 구호는 “힘에 의한 평화”였고, 반국가 세력들과의 “이념 전쟁”을 선언한 대통령이 중심이 된 열병이 이루어졌다. 자연스레 이 행사는 이례적으로 올해 들어 세차례나 열린 북한의 열병식과 비교되었다. 오늘날 많은 한국인에게 그런 식의 군사력 과시는 “북한 같은” 전체주의 국가의 이미지와 겹치는 낯선 의례다. 최신예 전차와 미사일들이 광화문 앞을 행진할 때, 시민들이 느끼는 감정은 강한 군사력으로 보호받고 있다는 안도감이 아니라 위정자들이 평화보다는 군사적 대결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다.

왜 한국이 여러 세대에 걸쳐 확장해 온 자유를 포기해 가며 애써 북한 정권의 수준으로 내려가 경쟁을 해야 하는가. 한때 레드콤플렉스에 기반을 둔 반공주의가 자유민주주의의 이름을 참칭하던 시절이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그런 과거를 수치스럽게 느낄 정도로 자유로운 체제에 살고 있다. 나는 한국 현대사가 이룬 이 성취가 꽤 자랑스럽다. 그러니 이 자유를 위협하는 반체제 세력을 경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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