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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장석준의 그래도 진보정치] 침공 전야에 다르위쉬를 읽는다

등록 2023-10-25 19:27수정 2023-10-26 02:38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지난 19일(현지시각) 가자지구 남부 라파흐(라파) 지역에서 이스라엘 공습으로 파괴된 건물 잔해를 파헤치며 수색 작업을 하고 있다. 라파흐/AFP 연합뉴스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지난 19일(현지시각) 가자지구 남부 라파흐(라파) 지역에서 이스라엘 공습으로 파괴된 건물 잔해를 파헤치며 수색 작업을 하고 있다. 라파흐/AFP 연합뉴스

장석준 | 출판&연구집단 산현재 기획위원

“그들은 그의 입에 쇠사슬을 물리고/ 그의 두 손을 죽은 자들의 바위에 묶었다/ 그러고는 말했다: 너는 살인자다!// … 그들은 모든 항구에서 그를 쫓아내고/ 그의 어린 연인을 끌고 갔다/ 그러고는 말했다: 너는 난민이다!” (‘팔레스타인에서 온 연인’, 송경숙 옮김, 아시아, 2007)

지금 자신들이 저지르지 않은 폭력의 책임을 추궁당하며 학살의 공포 앞에 놓인 200만명이 있다. ‘인간 짐승’, 이것이 이스라엘 국방장관이 그들에게 내린 판결이다. 이미 오래전에 그들은 이번처럼 난데없이 ‘난민’으로 내몰렸다. 그리고 그들 중 한 시인이 있어 그 순간을 노래로 남겼다. 그의 이름은 마흐무드 다르위쉬(1941~2008). 마치 ‘인간 짐승’이라는 폭언에 맞서 한참 전에 준비된 답인 것처럼, 이 시의 제목은 ‘인간에 관하여’다.

다르위쉬는 팔레스타인이 낳은 20세기의 위대한 시인이다. 또한 그는 민족해방을 위해 싸운 혁명가이기도 했다. 하지만 다르위쉬의 혁명은 팔레스타인인의 것일 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것이기도 했다. 그는 유대인과 아랍인이 공존하며 연대하던 이스라엘 공산당에서 혁명가 이력을 시작했다.

이후에는 주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에서 활동했지만, 다르위쉬의 적은 이스라엘 국가였지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는 아랍어만큼 히브리어를 유창히 말했고, 전선에서 서로 총부리를 맞대던 한 이스라엘 병사와 나눈 대화를 바탕으로 ‘병사는 흰 나리꽃을 꿈꾼다’라는 시를 썼다. 나중에 그 병사는, 이스라엘 안에서 평화를 위해 싸워온 역사학자이며 우리말로도 소개된 ‘만들어진 유대인’의 저자 슐로모 산드로 밝혀졌다.

말년까지 다르위쉬의 입장은 흔들림이 없었다. ‘자치’라는 이름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을 사실상 ‘유폐’시킨 오슬로 협정에는 처음부터 완강히 반대했다. 그러면서도 이스라엘과 평화협상에 돌입할 가능성은 항상 열어두었다. 이런 시각에서 그는 오슬로 협정을 주도한 파타와 이슬람 근본주의인 하마스를 동시에 비판했다. 파타의 부패와 투항주의를 질타했고, 민족의 독립을 해방이 아닌 새로운 억압으로 연결시킬 위험이 있는 하마스를 경계했다. 다르위쉬가 대변한 이러한 정신이야말로 팔레스타인 민족해방투쟁의 핵심 전통이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비극의 한가운데에서도 그 정신은 “이 땅에는 그래도 살 만한 것들이 있소”라고 노래한다(‘이 땅에는’). 그것은 “4월의 망설임”, “새벽의 빵 냄새”일 뿐만 아니라 “기억에 대한 침략자들의 두려움”이기도 하며, “감옥에 해 드는 시간”일 뿐만 아니라 “노래에 대한 폭군들의 두려움”이기도 하다.

이 불굴의 정신이 염원하는 목표는 도리어 소박하다. 그것은 팔레스타인인이 아닌 이들에게는 이미 당연한 현실인 ‘조국’이다. “나는 모든 말들을 배웠다, 그리고 오직 하나의 어휘를 조립하려고 그 말들을 해체했다/ 그것은: 조국”(‘나는 거기서 왔다’).

세계 곳곳의 온갖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침공은 벌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은 아니다. 다르위쉬의 시가 그랬듯이, 팔레스타인의 정신이 우리 모두의 영혼에 아프게 꽂힐 만큼 보편성을 유지하는 한, 아직 끝이란 없다. 하물며 굴복이란 낯선 외국어일 뿐이다. “교수형에 나는 죽을 수도/ 제물이 되어 나는 죽을 수도/ 그러나 나는 말하지 않는다:/ 우리의 사랑은 흘러가 끝나버렸다고/ 우리의 사랑은 죽지 않는다”(‘불가능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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