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우익에 반대하는 할머니들’의 한 회원이 2021년 2월19일(현지시각) 베를린 미테구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극우 폭력에 항의하고 희생자를 추모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 베를린/한주연 통신원
[세계의 창] 하네스 모슬러(강미노) | 독일 뒤스부르크-에센대 정치학과 교수
몇년 전 느닷없이 일본 교수 5명에게서 기이한 이메일을 받은 적이 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필자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독일 교수들에게 똑같은 이메일이 발송됐다. 그 내용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일본이 전쟁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이 거짓말이기에 이 역사 왜곡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이었다. 당시 독일과 일본이 나란히 힘을 합쳐 싸웠는데 유엔의 전쟁범죄로 낙인찍혀 희생을 당했다고 우기면 독일 지식인들에게 먹힐 줄 안 모양이다.
일본 사회에 일제와 2차 대전 당시 저지른 반인도적 범죄를 은폐하고 자국의 역사를 다시 쓰려는 반동적 극단주의 세력이 있다는 것은 필자도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치의 만행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라는, 자기들의 일그러진 역사수정주의에 동조하라는 어불성설 같은 주장을 직접 접하자 깜짝 놀랐다. 고등교육을 받은 몰염치한 이들의 불쌍한 자화상이다.
당시 일본 교수 5명이 독일 교수들에게 이메일을 보낸 진정한 이유는 2020년 9월 말 베를린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을 철거하라는 선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수많은 소녀와 여성들이 당시 일제에 의해 체계적이고 대규모로 강제 매춘과 살인을 당한 전쟁범죄를 상기시키는 베를린 소녀상은 이들에게는 눈엣가시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들이 소녀상을 세운 시민활동가들을 반일, 친북이라고 매도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독일에서 한-일 과거사 전쟁을 불러일으키는 투사는 이들 일본 우파 교수들만은 아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도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에게 평화의 소녀상 철거를 두번이나 요구할 정도로 집요했다.
일본 우파는 그렇다고 쳐도 일부 한국인들조차도 이런 심각한 역사 왜곡에 동조한다는 사실은 정말 충격이다. 이른바 ‘엄마부대’를 필두로 한 한국의 우익 반동 활동가들은 지난해 독일로 날아와 베를린 현지에서 소녀상 철거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들 역시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 매춘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그 여성들은 전쟁 중 성노예 피해자가 아니라고 억지를 부리는 등 일본 교수들과 비슷한 논리를 독일 국민과 정부에 피력했다.
물론 극단주의 세력은 어느 나라에나 어느 정도 존재한다. 건강한 사람의 몸이라면 썩은 음식을 조금 먹는다고 해도 위액 속에 들어 있는 산이나 장내 세균에 의해 분해되는 것처럼, 건전한 민주 사회라면 소수의 극단주의자를 감당할 수 있다.
하지만 영향력이 큰 정치 세력이 역사수정주의에 가담하면 위험해진다. 이런 점에서 현 한국 정부 아래서 벌어지고 있는 역사수정주의 움직임은 극히 우려스러울 수밖에 없다. 반인도적 범죄나 인권유린을 전면적으로 부인한 사례가 아직은 없지만, 대한독립군 홍범도 장군 동상을 폐기하고(cancelling)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문제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그냥 덮고, 한-일 관계의 어두운 과거사를 결말내려고(Schlussstrich ziehen) 하는 모양새는 충분히 심각하다. 또한 이런 정책을 비판하는 사람을 이른바 “공산전체주의 세력”으로 몰아세우는 등 냉전 시기 매카시즘식으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해 국민에게 과거사 미화를 강요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도 몹시 걱정스럽다.
그렇지만 한국 사회는 결코 그런 일부 정치인들의 일그러진 역사수정주의 시도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다. 왜냐하면, 그런 시대는 이미 지났고, 깨어 있는 한국 시민들은 퇴행적이고 낡은 정치인 계급보다 훨씬 앞서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베를린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 세워진 소녀상들이 자기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는 것은 세계인들도 이런 비판적 역사의식이라는 상식에 연대하여 함께 지킨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