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익 전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이 18억여원의 손해배상 청구와 가압류 철회, 해고자 복직 등을 주장하며 고공농성에 들어간 지 129일째인 2003년 10월17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진은 김 전 위원장을 추모하는 부산시내 시위 행렬. 한겨레 자료사진
장현은 | 노동교육팀 기자
커피믹스가 꽤나 싱거웠다. 지난달 12일 김주익 전 금속노조 한진중공업(현 HJ중공업) 지회장 20주기를 맞아, 기획 인터뷰를 위해 찾은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에서 김진숙 지도위원이 건네준 커피였다. 커피 취향 탓일 수도 있겠지만, 혹시 건강 때문에 싱겁게 탄 건 아닐까. 해고 노동자로 37년간 복직 투쟁을 이어온 그는 2018년 암 수술을 받았고 2020년 암이 재발해 다시 수술을 받았다. 인터뷰는 자연스레 현재 그의 건강 상태를 묻는 말로 시작됐다. 합병증으로 여러 진료과를 다니며 치료를 받고 있다던 그가 말했다.
“나는 술도 하지 않고, 뭐 다른 것도 하지 않는데… 암 발생 요인 10가지 중에 해당하는 게 한 가지밖에 없어요. 스트레스.”
그렇게 말했지만, 35m 높이 크레인 위에서 309일간을 고공 농성하는 등(2011년) 몸을 혹사해온 게 어찌 영향이 없을까. 박창수, 김주익, 곽재규, 최강서 등 함께 한진중공업 노조 활동을 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의문사한 동료들을 떠나보내면서 그의 맘에 남았을 상흔들은 얼마나 깊겠는가.
김 지도위원을 만난 이튿날, 충남 천안을 찾았다. 지난해 에스피엘(SPL) 평택공장에서 일하다 식품 혼합기에 끼여 숨진 박선빈(당시 23살)씨 어머니를 인터뷰하기 위해서였다. 어머니는 하루 여섯 알이나 되는 우울증 약을 먹고 있다고 했다. 딸을 그렇게 떠나보내고 장례식장에서부터 잠이 들 수 없어 복용하기 시작해 1년간 이어졌다고 했다. 어머니는 “다들 나아질 거라고 했지만, 1년 전보다 슬픔의 크기는 줄어들지 않고 더 커졌다”고 말했다. 죄책감과 무력감에서 오는 슬픔은 1년 동안 축적됐고, 그래서 여섯 알만큼의 병을 계속 앓고 있는 건지 몰랐다.
2022년 10월15일 에스피엘(SPL) 평택 공장에서 일하다 목숨을 잃은 박선빈씨의 모습. 어머니 전아무개(52)씨가 제작한 액자와 친구들이 놓고 간 사진 앨범 등이 봉안당 한켠에 놓여 있다. 장현은 기자
누군가의 20주기와 1주기를 기억하는 연이은 인터뷰에서, 자연스럽지 않은 죽음들이 주위에 남기는 상흔에 관해 생각했다. 보호받지 못할 때, 차별받는다고 생각할 때 인간의 몸은 더욱 아프다고 한다. 질병의 사회적 책임을 연구하는 사회역학자 김승섭 서울대 교수는 2015년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반대 파업 참가자의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비율이 이라크 전쟁 때 포로로 잡혀간 쿠웨이트 군인들보다 더 높다는 연구 결과를 내기도 했다. 무책임한 국가폭력에 노출된 노동자의 몸과 마음이 그만큼 깊이 병들게 됐다는 것이다. 병드는 건 사회도 마찬가지다.
노동 약자에 대한 윤석열 대통령의 최근 발언이 더 아프게 느껴진 이유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국무회의에서 “국민의 절박한 목소리”라며 ‘이주노동자 임금 차등 지급’ ‘50인 미만 사업장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유예’ ‘국제노동기구(ILO) 탈퇴’ 등을 언급했다. 소상공인의 어려움을 내세워 국적이 다른 이주노동자는 같은 일을 해도 임금을 덜 주고, 50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들의 안전할 권리를 뒤로 늦추자는 말이다.
하지만 값싼 노동력은 값싼 안전을 부르기 마련이다. 대놓고 “차별하자”는 나라에서 안전하고 보호받는다고 느낄 노동자가 얼마나 될까. 치료에 집중하느라 웬만하면 인터뷰를 사양한다던 김진숙 지도위원이 이번 인터뷰에 응한 것도, 선빈씨 어머니가 딸이 죽은 지 1년 만에 딸 이름을 공개하며 인터뷰에 나선 것도, 모두 ‘더는 죽고 다치지 않는 사회’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했다. 혼자 거꾸로 가는 대통령의 발언에 누군가의 20주기와 1주기를 기억하는 아픔이 더욱 오래갈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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