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 한국사회] 이광이 | 잡글 쓰는 작가
끝 바로 전이 끝보다 더 끝 같다. 조금 더 가면 끝일 때, 끝이라고 느끼는 것은 거기다. 끝에 다다르면 끝은 없다. 가는 사람은 가지 않고, 비는 내리지 않는 것처럼 끝에서는 끝을 볼 수 없다. 끝은 끝에 도착하기 전에, 이제 곧 끝이로구나 할 때 어렴풋이 안다. 끝이 보이면 아직 끝이 아니고, 끝에 이르면 끝이 보이지 않으니, 딱히 무엇을 끝이라 할까?
11월이 그렇다. 한 해의 끝은 12월이지만 11월이 더 끝 같다. 겨울로 가는 길이며 물끄러미 끝을 바라보고 있는, 11월에 바람 없는 날이 없다. 이미 떨어진 것들은 이리저리 쓸려 다니고, 몇 닢 안 남은 아직 덜 떨어진 것들이 팔랑거리는 날들, 나목의 섣달보다 더 끝 같다. 밤도 그렇다. 칠흑 같은 밤중보다 해가 져서 어둑어둑할 때 저 서편에서 오는 코발트블루의 밤이 보인다. 일을 마치고 어슬어슬 저물어가는 길모퉁이 주막에서 텁텁한 탁주나 한잔 마시고 싶을 때, 하루의 끝을 느끼는 시간은 그때다.
사랑이 또 그렇다. 사랑보다 더 사랑 같은 것은 아직 사랑에 들어가지 못하고, 사랑 근처에 있을 때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 묘유(妙有), 애가 타는 순간들이 사실은 사랑에 가장 가까이 가 있는 것 아닌가 싶다. 사과가 다 익었을 때보다 단맛이 스밀 때, 사랑은 그 익어가는 시간이었다는 것을 지나고 보니 아는 것이다. 그러니 그리 조바심 낼 것은 없다. 11월과 밤과 사랑과 혹은 세상만사가 어느 목적지에 따로 모셔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불편하고도 애절한 여정에 있지 않은가.
지리산 실상사에 다녀왔다. 늦가을 산사는 잎이 다 져서 단풍이 땅에 물들었다. 단풍은 하루에 20㎞ 남짓 사람이 걷는 속도로 남하한다고 하니, 내년에는 그 길을 쫓아 저 땅끝까지 걸어볼까, 그런 생각이 든다. 인연이 오랜 스님이 반가이 맞아준다. 저녁 공양을 마치고 차를 한잔했다. 송이를 말려 덖은, 차향이 은은하다. “스님 귀한 차를 내주시고, 참 친절하십니다” 하면서 내가 “절 중에 제일 좋은 절이 어느 절인지 아십니까, 그것이 친절이라 하데요” 하고 너스레를 떨었더니, “여전하구만~” 한다.
“절집에 내려오는 말 중에 개문칠건사(開門七件事)라고 있어. 아침에 일어나 사립문을 열면서 걱정해야 할 일곱 가지. 땔감 곡식 기름 소금 간장 식초, 그리고 차. 중이 아무리 빈한하게 살아도 이것은 꼭 있어야 한다는 거라.” 차가 들어간 이유를 물었더니, “사람이 계속 걸어갈 수는 없잖아. 앉아서 차도 한잔 마시고 놀기도 해야지. 마조 스님이 그랬다지 않아? 중노릇 보낸 세월이 30년인데 이제 겨우 간장이랑 소금 걱정은 덜었다고.” 절의 말이 알쏭달쏭하다. 무슨 뜻이냐고 물어도 듣는 둥 마는 둥 답이 없다.
방에 웃풍이 세다. 상강 지나면서 풀벌레 소리는 사라지고, 밤새 바람이 불어 문풍지 떠는 소리만 계속 난다. 선잠 들었다 깨고 잠들고 하다가 희미한 도량석 목탁 소리에 눈을 뜨니 밖이 희뿌옇게 밝아온다. 해가 뜨는 모양이다. 보광전 양옆 산등성이에 누런빛이 들고 있다. 앞산을 넘어온 햇살이 일주문 지붕에서 탑으로 석등으로 마당으로 내려온다. 사선으로 쏟아지는 금빛 물결들, 내가 ‘옆사광선’이라 이름 지은 사진의 골든타임이다. 해 뜰 때, 해 질 때, 하루에 두번, 세상 만물이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을까?
공양 시간이 되어 밥에 물을 붓고 시금치 넣어 끓인, 죽도 아니고 밥도 아닌, 허여멀건 것을 한사발 하고 나왔다. 밥 먹으면 떠나는 것이 절의 일이라, 오갈 데 없어도 어디론가 가야 할 시간이다. 경내를 어슬렁거리다가 합장하고 하직 인사를 했다. 아침볕에 스님 얼굴이 많이 늙었다. “이생 마치고, 또 한 생이 주어지면 사시겠습니까?” 하고 뜬금없이 물었더니, “알고는 못 살지, 모르니까 사는 거여” 한다.
절밥 두 그릇 얻어먹고 산문을 나오는 길, 11월도 벌써 하순이다. 곧 눈이 오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