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20일 서울 영등포구 63스퀘어 앞에서 열린 ‘장애인의 날을 거부하는 자들의 제22회 장애인차별 철폐의 날 기념식’에서 한 참석자가 전동휠체어에 매단 탈시설 관련 문구가 적힌 리본 너머로 탈시설에 대한 팻말이 보이고 있다. 김혜윤 기자
[똑똑! 한국사회] 유지민 | 서울 문정고 1학년
소수자를 소수자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크고 작은 차이를 별종으로 만드는 ‘차별’의 기저는 어디에서 왔는가?
오랫동안 품고 있던 의문이다. 이런 궁금증을 해소할 실마리를 학교에서 읽게 된 김지혜 작가의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 얻었다.
소수성을 가진 집단은 쉽게 평가당한다. 타인들을 불편하게 하거나, 과도하게 시간이나 공간을 차지하는 등 각양각색 까닭 탓에 소수자들은 갈 곳을 잃는다. 일부 개인의 실수가 전체를 배제하는 것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노키즈존’, ‘노시니어존’ 등이 이에 해당한다. 반면 다수 기득권 집단은 개인이 실수하더라도 집단 전체가 거부당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노성인존’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조금 더 미세한 차별은 걱정과 염려를 명목으로 배제하는 것이다. 이주배경 아동의 등록을 거부하는 어린이집이 그 사례다. “아프리카 아이가 없다”, “피부색이 달라서 적응하기 어려울 것이다”같이 차별적인 언사를 아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정당화한다. 이 부분에서 엄마가 내게 해줬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나를 어린이집에 보내려던 엄마는 한 어린이집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아이가 다른 원생의 발에 밟혀 다치면 책임질 수 없으니 받아줄 수 없어요.” 이런 배제는 살아오는 동안 끊임없이 이어졌다. 놀이동산, 동네 헬스장, 진학하려던 사립고등학교에서도 나를 거절했던 까닭은 전부 “걱정돼서”였다. 이렇게 다양한 양상의 차별 때문에 소수자는 사회로 나오는 것을 어려워하고, 상당수 포기하고 만다.
노골적 배제만큼 소수자를 좌절시키는 차별 요소는 ‘비가시성에 의한 고립’이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사람을 소수자로 만드는 중요한 성질 가운데 하나다. 사회의 물리적, 심리적 한계 탓에 소수자는 자신을 드러내기 어렵고, 세상은 드러나지 않는 이들을 더욱 소외시킨다.
이런 고립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첫번째는 아예 제거하는 것이다. 남아선호 사상이 횡행하던 시절 여아들은 아예 죽임당했다. 두번째는 사회로부터 격리하는 것이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 정부는 ‘도시환경정화사업’을 추진했다. 거리를 떠돌던 수많은 부랑인이 ‘도시를 깨끗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강제로 시설에 갇혀야 했다. 이러한 격리는 지금도 존재한다. 가족이 없거나 그들이 부양을 포기한 중증 장애인은 장애인 시설에 보내진다. 철저히 격리된 공간에서 본인의 뜻과 상관없는 삶을 살고, 폭력을 당하거나 죽음을 맞이하는 일도 있다. 시설 장애인의 생존과 자립을 위한 ‘탈시설’ 운동은 현재진행형이다.
노골적이지 않으나 더 심각한 고립은 스스로 숨게 하는 환경이다. 언뜻 봐선 드러나지 않는 소수성을 가진 이들은 때론 자신을 숨기고 사회의 주류 집단인 것처럼 행동한다. 성소수자나 외모로 판단이 불가한 인종이 이에 해당한다. 숨겨야 하기에 끊임없는 자기검열에 시달린다. 내가 너무 튀어 보이진 않을까?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진 않을까? 사회에서 내가 필요할까? 수많은 질문에 둘러싸여 만성적인 불안을 겪는다.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차별과 배제, 그에 따른 고립과 사회적 낙인에 대한 두려움. 이 모든 것들이 모여 소수자들은 스스로 드러나지 않기를 선택한다.
휠체어를 타고 바깥에 나가면 모두가 쳐다보는 것 같은 느낌을 자주 받는다. 무례한 시선을 받다 보면 시선을 받지 않을 때도 자주 불안감을 겪는다. 언제 어디에서 따라올지 모르는 부담스러운 관심에 위축된 적도 여러번이다. 아예 집 밖으로 나가지 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나는 휠체어를 타고,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다는 사소한 차이는 삶에 크고 작은 장벽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읽은 뒤 이런 상황에 적극적으로 저항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됐다. 세상에 주눅 들기엔 하고 싶은 일과 꿈이 많은 18살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