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타리무를 수확하여 손질해서 택배상자에 담고 있다. 원혜덕 제공
[똑똑! 한국사회] 원혜덕 | 평화나무농장 농부
11월의 마지막 날들은 가을일까, 겨울일까? 이 글을 쓰고 있는 11월 말 지금은 이미 추위가 시작되어 모두 겨울옷을 입고 있다. 그러니 겨울이라 여길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농사짓는 입장에서 11월은 마지막까지 가을이다. 모든 가을걷이가 11월 말이 되어야 끝나기 때문이다.
올여름 비가 많이 내렸다. 장마철에 비가 많이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문제는 집중호우다. 여름 강수 총량은 해마다 비슷하다는데 단시간에 많은 비가 쉬지 않고 퍼부으면 밭작물은 피해가 크다. 가을에 수확하려고 여름에 씨 뿌린 당근, 무, 알타리무(총각무)의 씨가 절반도 서지 않았다. 기르던 배추 모종도 비에 다 망가졌다. 거기에 병이 와서 알타리무 가장자리 잎이 누렇게 말라갔다. 새파랗게 올라오는 풀을 두고 볼 수 없어서 며칠간 매달려 김을 매주었지만 결국 당근과 함께 갈아엎었다. 생육 기간이 긴 당근은 포기하고 생육 기간이 비교적 짧은 알타리무는 가을 날씨가 도와주기를 바라며 새로 씨를 뿌렸다. 작은 알타리무와 달리 무는 다시 뿌려서는 도저히 뿌리가 웬만큼이라도 들 수 없겠기에 그냥 밭에 내버려두었다. 우리 김장에 쓸 만큼이라도 나오라고 바라는 마음만 있었다. 배추는 모종을 사다가 심었다.
무나 배추는 저온성 작물이다. 심고 난 뒤 찬 바람이 나고 일교차가 큰 가을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자라기 시작한다. 뒤늦게 자라는 그 모습을 보며 무가 제대로 커지고 배추는 속이 다 차기를 바란다. 그러려면 추위가 늦게 와야 한다. 다행히 무도 배추도 그런대로 자라주어 김장을 할 수 있었다. 다시 씨를 뿌린 알타리무도 쓸 수 있을 만큼 자라서 회원들에게 보낼 수 있었다.
가을 수확의 첫번째 차례는 벼 베기다. 여기 포천은 추위가 빨리 온다. 봄에 늦게 모내기를 하면 벼가 여물기 전에 서리를 맞아 수확량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벼를 일찍 심는다. 그런 만큼 가을에 일찍 거둔다. 늦게까지 밭에 두는 작물은 콩, 수수, 생강, 토란 등이다. 추석이 되면 토란을 조금 캐서 토란국을 끓이지만 작고 여물지 않아 맛이 덜하다. 첫서리가 온 다음이라도 날씨가 좋으면 계속 자라기에 토란과 생강은 추위가 오기 전까지 밭에 두었다가 캔다. 두줄 길게 심은 참깨는 수확해보니 두어됫박이 나와 집에서 쓸 양념거리는 되었다.
올 들깨는 잘 자라주었다. 여름에 밀과 귀리, 보리를 수확한 밭에, 모종으로 길러놓은 들깨를 심었다. 들기름은 우리 농장 회원들에게 보내는 가을 품목 중의 하나라서 농사가 잘 안되면 노심초사한다. 집에서 먹으려고 기른 채소는 망가지면 아쉬운 정도지만 회원 품목에 들어가는 작물은 망가지면 말 그대로 애가 탄다. 들깨를 베어서 바싹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털었다. 턴 들깨를 풍구질하여 검불과 쭉정이는 날려 버리고 씻어서 다시 말렸다. 그리고 방앗간에 맡겨 기름을 짰다. 들깨가 밭에서 마르기를 기다리는 동안 생강을 캤다. 생강은 조금씩 2년 길러보고 자신이 생겨서 올해 회원용으로 새로 첨가한 품목이다. 생강을 캐서 씻고, 껍질을 벗기고, 저며 말려서 가루를 냈다. 생으로 된 생강보다 회원들이 오래, 그리고 편하게 쓸 수 있도록 마른 생강가루로 만들었다. 방앗간에서 짜온 들기름과 집에서 낸 생강가루까지 회원들에게 보내고 나니 가을일이 정말로 끝났구나 싶다.
무엇이든 심으면 잘 자라기를 바라며 마음을 놓지 못하는 게 농부의 사정이지만 추위가 닥치기 전에 수확과 갈무리를 마쳐야 하는 11월에는 더욱 집중한다. 작물이 자란 상태를 보며 매일의 날씨와 일주일의 일기예보를 확인하면서 수확 등 일의 순서를 정한다. 농부는 계절과 호흡을 맞춰 사는 사람이다. 자연의 순환에 따라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 농부다.
이제 밭에 남은 것은 지난달에 심은 양파와 마늘이다. 이 두 작물은 추운 겨울을 견디고 봄을 맞아 파랗게 자라날 것이다. 우리 모든 밭은 겨울 동안 쉬면서 기운을 회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