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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실패한 수업?

등록 2023-12-10 18:28수정 2023-12-11 02:39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특성화고등학생권리연합회 등 노동·교육·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2021년 4월12일 서울 중구 민주노총에서 학교부터 노동교육 운동본부 발족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특성화고등학생권리연합회 등 노동·교육·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2021년 4월12일 서울 중구 민주노총에서 학교부터 노동교육 운동본부 발족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 말고] 명인(命人) | 인권교육연구소 ‘너머’ 대표

전남의 한 중학교에서 20시간에 걸쳐 ‘노동인권 인문학’ 수업을 진행했다. 학교에서 정규 수업시간에 10회나 노동인권을 주제로 수업을 진행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노동인권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껴온 교사들, 그런 교사들에게 공감하는 학부모들, 이 주제로 다회차 수업을 기획하고 교육프로그램을 설계한 활동가들이 다같이 마음을 모으지 못했다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학급별로 진행된 이 수업에서 그동안 학생들과 나눴던 이야기의 주제는 이런 것들이었다. ‘행복의 조건, 내 생각은 어디서 왔을까, 가치관 여행, 소비자로 보는 세상·노동으로 보는 세상, 노동의 가치, 살림의 노동·죽임의 노동, 차이가 어떻게 차별이 되었을까, 학생인권과 노동인권, 인권의 교차성, 공정성과 인권, 권리와 존엄 사이, 나의 진로 나침반' 등. 다행히 학생들은 매주 이 시간이 기다려진다고 말해주었고, 수업은 매번 아주 역동적인 토론 속에 이루어졌다.

그런데 마지막 수업 날이었다. 수업 시간을 20여 분쯤 남겨두고, 나는 학생들과 그동안 이 수업에서 배운 것과 느낀 것에 대한 소감을 나눴다. 다양한 이야기들이 오가는 중에 한 학생이 대뜸 물었다. “쌤, 솔직히 말해도 돼요?” 언제나 수업 시간에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해왔고, 매번 질문이 많았던 학생이었다. 나는 “물론”이라고 대답했다. “그동안 진짜 재밌긴 했는데요, 그래도 쌤, 이 수업은 실패하셨어요.” 나는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반문했다. “쌤, 제가 질문 많이 했었잖아요? 근데 쌤은 한 번도 속 시원히 정답을 알려주지 않았어요.” 나는 그제야 질문한 속내를 눈치채고 지그시 웃었다. “맨날 우리 생각을 다시 물어보거나, 우리끼리 토론하라 그래서 뭘 배웠는지 모르겠어요. 질문만 엄청 더 늘어났다고요.” 학생의 마지막 말은 볼멘소리에 가까웠다. 나는 어떤 질문이 더 늘어났느냐고 물었다. 그 학생은 “저 봐, 저 봐. 또 대답은 안 하고 질문으로 돌려준다니까.” 그 말에 다른 학생들이 모두 빵 터졌다. 그 웃음들엔 다수의 공감이 묻어있었고, “맞아, 맞아!” 하며 책상을 두드리는 학생들도 있었다.

학생에게 늘어났다는 질문들을 듣고 나는 오히려 자신감을 얻었다. “전 여러분이 품은 그 질문들이 참 귀하게 느껴져요. 이 수업은 오늘로 끝나지만, 전 여러분이 그 질문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이제, 여러분들이 언젠가 찾아낼 각자의 정답을 들어볼 기회가 없겠지만, 그때 여러분의 정답도 절대로 정답에서 끝나지 않길 바라요. 그 정답은 반드시 또 다른 질문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학생들은 내 대답에 여전히 아리송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간절히 바랐다. 이 학생들이 스무 살? 서른 살? 어쩌면 그보다 더 나이가 들어서라도 내 바람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기를. 그리고 이 학생들이 온몸으로 질문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나는 언젠가부터 ‘가르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씨앗을 뿌리는 일이라고 생각해온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나는 교육을 준비할 때, 단기적인 교육 효과에 별 기대를 하지 않는 편이다. 그리고 나는 그 씨앗이 내가 ‘가르친’ 정답이 아니라 수업 시간에 했던 나의 말, 나의 행동, 심지어 나의 침묵까지 포함한 내 존재와 학생들의 존재가 마주치는 순간에 심어질 거라고 믿는 것 같다. 그래서 교육은, 교육 참여자에게 내재된 잠재력을 믿지 않으면, 아주 긴 호흡이 아니면, 내가 뿌린 씨앗이 대체 어디로 날아가 어디서 싹을 틔울지 몰라도 씨를 뿌리겠다는 의지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나는 다만 건투를 빈다. 이 수업에서 만발했던 학생들의 무수한 질문들이, 이 불행한 교육환경 속에서도 끝까지 살아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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