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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시간을 저축해 서로 돌보는 사회

등록 2023-12-21 09:00수정 2023-12-21 09:13

‘타임뱅크’ 창시자 에드거 칸 박사가 2018년 11월7일 생명보험교육문화센터에서 열린 강연에서 “모든 사람은 특별하다”고 노동의 평등을 강조했다. 이봉현 경제사회연구원장
‘타임뱅크’ 창시자 에드거 칸 박사가 2018년 11월7일 생명보험교육문화센터에서 열린 강연에서 “모든 사람은 특별하다”고 노동의 평등을 강조했다. 이봉현 경제사회연구원장

[똑똑! 한국사회] 조기현 | 작가

만약 우리가 누군가를 도운 시간이 저축된다면 어떨까? 내가 도움이 필요해질 때 저축된 시간을 쓸 수 있다면? 시간이 화폐처럼 교환 가능하다면 우리는 어떤 도움을 주고받을까? 지속해서 타인을 돌볼 수 있을까? 이런 상상을 하게 만드는 아이디어가 바로 타임뱅크(Time bank)다. 타임뱅크는 말 그대로 시간을 저축하는 은행으로, 시간은행이라고도 부른다.

이제까지 우리는 가족이라는 매개로 누군가를 돌보거나 돌봄을 받았다. 혹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로 돌봄을 제공했다. 하지만 점점 적어지는 가족의 수로 돌봄 부담은 늘어나고, 돌봐줄 가족이 없어서 고립되는 경우도 많아졌다. 그렇다고 모든 돌봄 필요를 서비스나 상품으로 대체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결국 돈이 있는 사람만이 돌봄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가족도, 임금도 아닌 시간이 매개된다면 어떨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각자 시간의 가치는 다르게 평가될지언정, 시간은 누구에게나 있다. 타임뱅크는 그 시간을 매개로 서로 돌보는 관계를 구축하자는 제안이다.

타임뱅크가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타임뱅크는 1980년 미국에서 처음 제안된 이후 34개국에 걸쳐 퍼졌다. 미국, 영국에서는 300개 이상의 타임뱅크 기관이 운영될 정도로 활성화돼 있다. 대부분 민간 영역에서 운영하는 것과 달리, 중국은 인구 고령화에 대응하는 노인복지의 하나로 지방정부가 앞장서 도입했다. 한국도 다양한 복지관, 종교단체, 지방자치단체에서 시행 중이다. 한국에 처음 타임뱅크를 시행한 곳은 경북 구미의 사단법인 구미사랑고리공동체로, 2005년 시작했으니 20년이 다 되어간다.

타임뱅크를 처음 구상한 사람은 미국 인권변호사 에드거 칸이다. 그는 인권변호사로 다양한 사회활동을 하다가 심장질환으로 병원에 입원한다. 환자가 되어 돌봄을 받는 처지가 되자, 제공과 수혜라는 이분법적 관계에 문제의식이 생겼다. 수혜자는 쓸모없는 사람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쓸모가 있다고 느껴야 하는 기본적인 욕구가 있고, 끊임없이 받기만 하고 돌려달라는 요구를 받지 않는 것은 사람들의 인생을 녹슬게 할 수 있다.”

‘이제, 쓸모없는 사람은 없다’, 그의 책 제목이자 타임뱅크의 핵심 가치이다. 제공자와 수혜자가 나눈 일방적인 돌봄 관계는 양쪽 모두에게 독이다. 제공자는 소진돼서 주저앉을 위험이, 수혜자는 무의미 속으로 가라앉을 위험이 있다. 우리 모두에게 능력이 있다. 다만 그 능력을 발현할 수 있는 조건과 관계가 부재하기에 능력은 쓸모가 없다.

중증장애로 침대에서 생활하는 이는 1인가구 노인에게 전화해서 안부를 묻고 옛날이야기를 나눈다. 지역사회에 참여하고 싶은 초등학생들은 한글을 모르는 노인에게 한글을 가르친다. 지적장애가 있지만 숫자에 능통한 이는 아이들에게 구구단을 알려준다.

3년째 타임뱅크를 시행 중인 경기 부천 고강종합사회복지관은 타임뱅크 덕에 지역사회에 참여하는 이들의 연령대와 성별이 다양해지는 것을 확인했다. 기존에 중장년 여성들이 주로 활동했던 지역사회에 중년 남성과 청년들도 모여들었다. 기존에 봉사활동처럼 내용을 정하고 모집한 게 아니라, 스스로 기여할 수 있는 능력을 알리고 그 능력이 필요한 이를 연결했기에 가능한 변화였다.

누군가를 돕고 돌보는 시간이 저축된다면, 돌봄이 처한 불평등이 해소될 수 있지 않을까? 돌보는 사람은 늘 세상에서 뒤처진다. 경제적으로 취약해지고 사회적으로 위축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돌봄을 받아도 돌봄을 하지 않아야 뒤처지지 않는 세상이다. 이런 돌봄의 불평등은 돌봄을 했던 사람이 나중에 돌봄을 받지 못하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시간이 저축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돌봄을 했던 시간만큼 돌봄을 받을 수 있기에. 반면 돌봄을 하지 않는 사람은 지역사회에서 돌봄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 모두가 돌봄을 수행해야만 돌봄이 순환할 수 있다. 타임뱅크에 당신의 시간은 얼마나 저축돼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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