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방언에선 구개음화가 흔하다. ‘김치’를 ‘짐치’라고, ‘견디다’를 ‘전디다’라고 발음한다. 정약용이 강진 유배지에서 쓴 경세유표와 그의 형 정약전이 흑산도 유배지에서 쓴 자산어보에 ‘짐’이라 기록한 것이 있는데, ‘김’이다. 연오랑이 해초를 따던 바위가 갑자기 떠내려갔다는 삼국유사의 기사로 보아, 우리 조상이 해초를 먹기 시작한 건 아주 오래된 일이다. 조선시대 기록엔 물김을 얇게 펴서 말린 해의(海衣)가 흔히 나온다.
숙종 때인 1713~1714년 광양 현감을 지낸 허심이 쓴 김여익 묘비문에는 ‘영암 사람 김여익이 1640년 광양 태인도에 와서 살았는데, 이곳에서 처음으로 김을 기르기 시작했다’고 쓰여 있다. 김 양식에 대한 가장 명확한 기록이다. 양식 광양 김이 타지로 퍼지면서 김여익의 성을 따 ‘김’이라 부르게 됐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조선시대에 김은 너무 비싸서 대중적 소비품이 되기 어려웠다. “대해의(큰김) 1첩(20장인데 무게는 525.6g으로 오늘날의 200장에 해당)이 목면 20필 값이라니 진상하지 말라”(효종실록, 1650년)고 임금이 지시한 일도 있다. 일본에서는 김여익이 시작한 것보다 반세기가량 늦게 양식을 시작했지만 막부의 명으로 대량 양식이 이뤄지면서 전병, 주먹밥 등 서민 음식에도 널리 쓰였다.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일본은 1917년 완도에 조합을 설립하고 어민들에게 김 양식, 가공법을 가르쳤다. 생산한 김을 대부분 수입해 갔다. ‘식용 해초’를 통틀어 일컫는 일본어 ‘노리’(のり)에 해당하는 해태(海苔)가 이때 들어왔고,
가로 21㎝, 세로 19㎝인 일본 김 규격도 퍼졌다. 완도 김 수출량은 해방 뒤 더 늘어나면서, 가발이 수출 주력품이 되기 전까지 우리나라 외화벌이를 이끌었다.
최근 10여년 새 김 수출이 또 크게 늘어, 올해는 12월20일까지 7억7057만달러로 1조원을 돌파했다고 해서 화제다. 일본산이나 중국산에 견줘, 한국 김의 특징은 아주 얇게 뜨는 것이다. 김밥용으론 최적이다. 기름을 바르고 소금을 뿌려 구운 조미김이 일본에서 특히 인기였는데, 2013년부터는 미국으로 수출하는 물량이 더 많다. 올해 미국에선 냉동김밥 열풍이 불기도 했다.
모든 게 좋아 보이지만 기후위기가 복병이다. 해수 온도가 올라 김이 잘 자라지 못해, 2019년 60.5만톤이던 김 생산량이 2022년 54.8만톤으로 줄었다.
정남구 논설위원
jej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