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화성 서장대 / 김종철

등록 2006-05-02 19:48

유레카
세계 문화유산인 수원 화성의 여러 건물 중 하나인 서장대가 20대 남자의 방화로 불탔다. 서장대는 1996년에도 화재로 소실된 바 있다.

장대는 말 그대로 장수가 올라가 전투를 지휘하는 곳으로, 서장대는 서쪽에 있는 장대다. 보통 성안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는 장대는 대개가 누각으로 지어져 경관이 좋고 건축미도 빼어나다. 남한산성의 서장대(수어장대)와 진주성의 남장대(촉석루), 수원 화성의 서장대(화성장대)와 동장대 등이 유명하다.

화성 서장대에는 조선 후기 문화중흥을 이뤘던 정조(1776~1800년)의 부국강병 꿈과 효심이 서려 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양주에서 수원 화산으로 옮긴 정조는 1794년 자립적인 혁신 새도시 화성 건설에 나선다. 성곽과 행궁, 주거지뿐만 아니라 농업 기반시설인 만석거(저수지)도 만들었다. 그는 세자가 15살이 되면 왕위를 물려주고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와 함께 화성에서 살겠다는 뜻을 여러차례 내비쳤다.

화성의 윤곽이 어느 정도 드러난 1795년 윤 2월 정조는 어머니를 모시고 여드레 동안 화성에 행차했다. 행차 나흘째이자 혜경궁의 회갑연 전날 낮과 밤 두차례에 걸쳐 친위군인 장용외영 소속 군사 3700여명의 훈련을 실시한다. 서장대에서 훈련을 지휘한 정조도 갑옷과 투구를 썼다. 북과 나팔, 함성, 포성이 진동했으며, 야간에는 성 전역에 횃불을 켰다. 효자로 소문난 정조는 행궁에 머물고 있는 혜경궁이 놀랄까봐 포성이 높지 않은 포탄을 쓰도록 하고, 그것도 행궁에서 멀리 떨어진 서북쪽으로만 쏘도록 했다.

일제와 6·25를 거치면서 유실됐던 서장대 등은 1975년 복원공사로 원형을 찾았다. 화성 건축의 전말을 기록한 ‘화성성역의궤’ 덕분이다. 성곽이나 건물의 형태, 특징뿐 아니라 공사 자재, 심지어 감독관과 일꾼들의 이름, 출신지, 품삯까지 자세하게 기록돼 있다. 기록의 승리다.

김종철 논설위원 phillkim@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