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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나라살림] 교과서 속의 현실과 실제의 현실 / 류동민

등록 2006-05-31 22:23수정 2006-06-09 16:35

류동민 충남대 교수·경제학
류동민 충남대 교수·경제학
나라살림가족살림
실로 오랜만에(!) 내 전공과 관련된 경제칼럼을 써야 하는 부담 때문에 새벽잠까지 설쳐댄 탓에 아직도 지끈거리는 머릿속으로 한-미 자유무역협정이나 케이티엑스(KTX) 여승무원 파업 등의 무거운 문제가 정리되지 않은 생각 조각이 되어 떠돌아다닌다. 사실 95% 이상의 경제학자들은 예컨대 사회학 같은 인접분야의 학자들과는 달리, 이런 사안들에 대해 ‘따뜻한 가슴’보다는 ‘차가운 머리’를 강조한다. 그리고 그것은 경제학자의 개인적 품성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경제이론만이 경제현실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경제학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는 얘기 중에 ‘죄수의 딜레마’라는 것이 있다. 공범인 두 용의자가 각자 의리를 지켜 끝까지 자백하지 않으면 둘 다 가벼운 처벌만 받고 풀려날 수 있지만, 각자 서로 배반하면 둘 다 무거운 처벌을 받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각 개인의 이기적 행동이 사회 전체적으로는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 미국 대학에서 이루어진 죄수의 딜레마 게임 실험에서 경제학과 학생들은, 예컨대 (아마도 훨씬 영악하지 못한) 천문학과 학생들보다 상대를 배신하는 비율이 훨씬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매트 리들리, 〈이타적 유전자〉)

이런 현상은 분명히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끊임없이 그 경제주체들로 하여금 합리적인 계산을 하도록 만들어 나가는 경향을 갖는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 미시경제학에서 인간을 항상 머릿속에 전자계산기와 여러 상품들의 가격목록을 지니고 다니면서 매순간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소비조합을 선택하는 것처럼 묘사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드는 계몽효과를 갖는다. 오래전 미시경제학을 처음 배우던 시절, 나는 이건 말도 안 되는 비인간적인 이론이라 투덜대면서 너무나도 손쉽게 다른 경제학의 길로 투항(?)해 버렸다. 그렇지만 지금 내 지갑 속에 들어 있는 각종 마일리지 카드를 헤아리며 피자 한 판을 살 때와, 아무 생각 없이 살 때의 경제적 차이는 꽤 크다! 미시경제학에서 묘사하는 합리적 인간이 되도록 강요당하는 현실인 것이다.

〈이타적 유전자〉의 필자는 그래도 진리는 진리일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그러면 거짓말을 가르치며 도덕적인 인간이 되라고 설교할 것인가라고 반문한다. 이는 놀랍게도 ‘차가운 머리’를 강조하는 경제학자들의 입장과도 맞닿아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참/거짓의 문제라기보다는 담론의 정치적 효과의 문제라 보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자본주의를 대등한 힘을 가진 이기적 개인들이 모여 주판알을 튕기며 거래하는 시장으로 묘사하는가, 아니면 비대칭적인 권력을 가진 주체들이 모여 지배/피지배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으로 묘사하느냐는 그 어느 한쪽이 절대적인 진리라기보다는 현실을 나름대로 해석하며 더욱이 현실을 그에 맞게 변화시켜 나가는 이론적 투쟁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최근 중고등학교 경제교과서의 내용이 반시장적이고 반기업적이라는 줄기찬 문제제기 끝에 마침내 전경련은 교육부와 경제교육의 ‘개선’에 합의하고 자금까지 부담하기로 합의하였다. 자유무역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최고의 선이고 노동력의 거래는 과일가게에서 사과를 사는 것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는 ‘차가운 머리’의 논리가 교과서를 차고 나와, 대부분 노동자가 될 우리 아이들의 머릿속을 거쳐 결국에는 우리의 현실로 자리 잡을 것을 생각하면, 지끈거리는 머리는 어느새 뜨거워진다.

류동민 충남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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