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미 대중예술 평론가
야!한국사회
말이란 것이 참 묘한 것이어서 어떤 말은 좀처럼 중립적인 어감으로 쓸 수 없는 말이 있다. ‘사랑’이니 ‘화해’니 하는 말에서는 긍정적 어감을, ‘집착’이니 ‘야합’이니 하는 말에서는 부정적 어감을 지워버릴 수 없다. 아마 ‘공동체’란 말도 그런 종류일 것이다. ‘공동체’란 말을 부정적으로 사용하는 일은, 아마 우리 사회에서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공동체란 사람을 늘 편안하게만 하지는 않는다. 흔히 공동체의 삶을 설명할 때, 이웃집 강아지가 몇 마리인지, 그 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도 다 아는, 한가족 같은 관계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런 삶은, 남의 집 부엌 출입을 예사로 할 정도로 사생활이란 것이 보장되지 않는 불편한 삶일 수 있다. 이런 사회에서는 남의 도움으로 잘 되는 일만큼이나 남의 참견과 방해로 잘 안 되는 일도 많다. 공사 구별이 잘 안되는 것은 물론이고, 의견 수렴의 절차 역시 반드시 합리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공동체 안의 사람들은 이 정도의 불편일 뿐이지만, 공동체 밖의 사람들은 이 공동체 때문에 상당히 불쾌하고 때때로 불행하다. 모든 공동체는 다 어느 정도의 배타성을 지니고 있다. 공동체의 안과 바깥을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배타성을 지니고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 바깥에 밀려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소외감과 불쾌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흥미로운 것은, 공동체 안의 사람들끼리 결속력이 공고해지고 집단적 즐거움이 배가되고 자신의 공동체에 대한 자부심이 커질수록, 그 바깥에 있는 사람의 소외감과 불쾌감은 점점 더 커진다는 것이다.
젊은 대학생들의 자부심에 넘친 소란스러운 축제들은, 대학 문턱이 높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큰 소외감을 주고, 은혜와 구원의 확신이 넘치는 종교적 공동체 역시 바깥의 ‘불신자’들에게는 오만불손하기 이를 데 없는 집단으로 다가온다. 시위 역시 그러하다. 시위대 안에 있을 때는 시위대에게 투쟁의 확신을 불어넣고자 머리띠도 강렬하게 묶고 구호도 세게 외치는 것이 중요하건만, 바깥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처지가 되면 그것들은 모두 과격성과 폭력성이 배가되는 것으로밖에 비치지 않는 것이다. 1980년대의 마당극이 실제보다 훨씬 더 과격한 연극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역시, 내용과 표현의 과격성 탓이라기보다는 관객과 한덩어리가 되어 자기네들끼리만 재미있어 죽고 못 사는, 그 독특한 공동체성 때문이라고 보인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공동체가 부정하기 힘든 강력한 대의명분과 물리적 힘을 갖추었을 때, 그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폭력성과 공포심을 느낀다. 명분으로 설득하고 집단적 힘으로 밀고 들어와, 그냥 먹혀버릴 것 같기 때문이다.
아마 지금 월드컵 공동체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의 느낌이 그러할 것이다. 신문이건 방송이건, 길거리 간판과 옷가게와 음식점까지도, 도대체 월드컵 청정지대를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은 소외감과 불쾌감을 느끼고, 이성을 통한 설득이 불가능해 보이는 그 집단적 에너지는 끔찍하고 두렵게 느껴진다. 여기에 국가적 명분과 공공기관의 힘이 더해지면 그 공동체성은 더더욱 폭력적이고 불건강하게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공동체 안에서의 자부심과 즐거움이 그러하듯, 그 바깥의 소외감과 두려움도 다소 몰이성적인 측면이 있다. 공동체에 대한 호감과 욕구가 매우 강하여 그 양자가 다 크고 강하게 나타나는 우리 사회에서, 나는 이 월드컵 공동체에 대한 흥분도 불쾌감도 조금 덜어낸 ‘쿨’한 태도를 유지하려고 노력 중이다.
이영미 대중예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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