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남구 기자
유레카
모호한 표현을 잘 쓰기로는 일본인을 따라잡기 어렵다. ‘평화조약 11조 관계자’라는 표현도 그 가운데 하나다. 일본이 1952년 연합국 48개국과 맺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제11조는 “1948년 11월에 열린 극동군사재판에 따른 에이(A)급 전범 28명에 대한 처벌을 일본이 받아들인다”는 내용을 담았다. 그러므로 ‘평화조약 11조 관계자’란 한마디로 ‘에이급 전범’이다. 그런데 일본 정부관리들은 ‘관계자’라는 모호한 표현을 써가며 전쟁범죄를 저지른 역사를 짙은 안개로 덮어버린다.
우리 언론의 보도에도 ‘관계자’라는 표현이 적잖게 나온다. ‘청와대 관계자’, ‘검찰 관계자’처럼 익명의 취재원을 흔히 그렇게 나타낸다. 언론은 부득이 취재원의 익명 요구를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다. 문제는 관계자란 표현이 남발된다는 데 있다. 실명을 써도 되는 경우까지 관계자가 등장하고, 익명 처리에서도 어지간하면 다 관계자다.
‘관계자’가 포괄하는 범위는 매우 넓다. 예컨대, ‘검찰 관계자’라면, 검찰 고위 간부일 수도 있고, 일선 검사일 수도 있고, 수사관일 수도 있다. 또 기사에서 거론하는 사건의 수사를 직접 담당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런 차이를 ‘관계자’라는 표현 속에 얼버무리는 것은 기사에 대한 독자의 신뢰를 깎아먹는 일이다. 검찰청에 출입하며 취재하는 기자도 검찰 관계자에 속한다는 말이 있다. 우스갯소리만은 아니다.
방법이 없을 리 없다. 익명 취재원이라도 ‘수사팀의 한 검사’, ‘수사팀의 한 수사관’ 등으로 취재원에 대한 정보를 독자에게 최대한 드러내면 ‘관계자’ 남발을 줄일 수 있다. 그것은 독자가 기사의 정보 가치를 판단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익명보도를 줄이기 위해 애써온 〈한겨레〉부터, 모든 기사에서 ‘관계자’란 표현을 추방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어떨까.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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