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남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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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인들은 자기들만 아는 어려운 법률용어를 고집한다. 의사들은 환자가 못 알아보게 처방전을 쓴다. 언어의 장벽을 세워 자신들의 권위를 지키려는 것이다. 그들을 통하지 않고는 법의 보호를 받고 치료를 받을 재간이 없으니 대중은 따르는 수밖에 없다. 소수만이 특권을 누리는 권위의 성을 깨는 것은 그래서 개혁이다.
세종대왕은 한글(훈민정음)을 만들었다. 글자 그대로 ‘백성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문자로 법을 설명해, “모름지기 세민(빈민)으로 하여금 금법을 알게 하여 피하게 하는 것이 옳다”고 세종은 강조했다. 법조문과 관련한 백성의 억울함을 없애고, 말하고 싶은 것이 있을 때 제 뜻을 쉽게 표현할 수 있게 하자는 게 세종의 생각이었다.
종교개혁가 루터의 성서 번역도 같은 맥락에서 이뤄진 일이다. 그는 교회로부터 파문당한 뒤 라틴어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다. 루터에게 신의 은총은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신앙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신의 말씀을 모든 사람에게,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과 글로 알리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그래서 그의 성서 번역은 “고향의 어머니와 길거리의 아이들과 시장의 평민들의 언어로 이뤄져야 하는” 일이었다. 루터의 성서 번역은 자칫 대중으로부터 버림받을 수도 있었던 기독교의 지평을 크게 넓혔다.
최근 ‘인문학의 위기’를 거론하는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높다. 하지만 그에 호응하는 소리는 그다지 들리지 않는다. 인문학이 이미 그들 인문학자들만의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은 아닐까. 성은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한 울타리이나, 도리어 스스로를 가두는 벽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대중이 그 권위를 인정하는 대신 떠나버릴 때다. 그런 점에서 보면 지금 위기에 빠진 것은 인문학이라기보다는 인문학자들이다.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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