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한국사회
최근 여성의 관점에서 글을 쓰다 보니 많은 남성들한테 비난을 듣는다. 필자가 공부만(?) 하기 때문에 남성들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위험한 전쟁터에 나갈 수 있는(나가야 되는) 남성들은 여성들과 다르다는 것이 핵심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핵 위기’가 그들의 ‘주인 구실’을 정당화하고 있다. 그러나 ‘남성들만의 과도한 주인의식’은 남녀 모두를 불편하게 한다.
“당신들이 하는 이야기들은 이제까지의 남성의 역할을 축소하는 듯하여 감히 불쾌하오. …(중략) … 여성을 존중하는 것도 잘은 모르지만 중요한 것 같소. …(중략) … 난 여자들은 나비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오. 꽉 잡으면 죽지만 놓아두면 날아가 버릴 것이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사회가 유지되겠소. …(중략) … 요즘처럼 무서운 세상에서 여성들을 잘 보호하는 것이 남성들의 책무요. 인간자본이 중요한 한국 사회에서 여성들이 아이 잘 낳고 키우도록 사회가 지원하는 것 찬성하오. … (중략) … 그런데 집 한 채 갖고 법 지키며 오순도순 살아가는 우리 같은 소시민인 남성들에게 당신들의 이야기는 위협적일 때가 많소.”(49살 남성의 전자우편)
일단 필자에게 이러한 지적을 하기 위해 자신을 돌아보려는 남성들에게 감사한다. 동시에 필자는 ‘남성들이 생각하는 여성·남성들에 대한 고정관념’이 남성·여성들을 불행하게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남성의 세계 안에서 만들어진, 남성에게 익숙한 이미지로 재현되는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은 여성들의 구별되는 특징 등을 한데 묶어 여성들의 다양한 능력들을 보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남성들에게 과도한 책임감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여성에 대한 ‘전형화’는 역사적 계기와 무관하게, 그것이 여성의 영원한 속성·본질인 것처럼 세심하게 선택된 형용사 조합-나비처럼, 연약한, 보호해야 할 동시에 간사한, 독한-의 이분법을 통해 작동된다. 그러다 보니 남성이 생각하는 여성들은 ‘어머니’ 같거나 요부일 수밖에 없다. 어머니 같은 여성들은 (남성들이) 보호하고 요부들은 남성들을 위협하는 꽃뱀으로서 항상 (남성들이) 처단해야 한다. 그 외의 여성은 여성이 아니다. 그러니 남성성의 과도한 실천은 ‘남성의 여성에 대한 환상’ 속에서 여성에 대한 성폭력, 성구매라는 현실이 된다. “그냥 관계 한 것이 성폭력이라네요”, “성욕을 풀어야 건강하죠”라는 남성들의 고백이 예사롭지 않다. ‘여성들이 무섭다’는 그들의 목소리도 그냥 흘려버리기에는 진실이 느껴진다.
그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경쟁과 능력 발휘를 요구하는 남성 사회에서 ‘남성으로 살기’는 힘들고 외롭다. 카를 마르크스의 설명처럼 ‘돈만 있으면 추남이 미남이 된다’는 것은 돈 없는 자에게는 슬픈 현실이다. 특히 요즘 같은 부의 양극화 시대에 모든 남성이 미남이 될 정도로 돈을 벌 수는 없다. 아니 돈이 있어도 미남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그들을 더 불안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남성들의 외상적 상처(trauma)다. 프로이트 식으로는 거세불안이지만 실은 ‘남성성의 승인’에 대한 남성 스스로 만든 자기 함정이다. 이 함정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남성들은 다른 민족, 다른 계급에 속한 남성이 아니라 만만한 여성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며 ‘비겁하게’ 위로를 받는다. 아무리 힘들어도 여성들에게 자신의 특권을 양보하지 않는다. 그렇게까지 해서 남성이 되는 것이 행복하리라고 믿어서라면 필자는 그 ‘믿음’이 부메랑처럼 자신을 영원히 괴롭힐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변혜정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연구교수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