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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한국사회] 수업을 마치고 / 권수현

등록 2006-12-11 17:47

권수현/한국여성민우회 <함께 가는 여성> 편집위원
권수현/한국여성민우회 <함께 가는 여성> 편집위원
야!한국사회
인간 문제를 사유하면서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까? 문득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어떤 이는 사유의 차원에서는 그것이 가능할지라도 실천의 차원에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하기도 한다. 사유의 차원이건 실천의 차원이건, 크고 작은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고 여성 문제에 천착한다는 건 내게는 ‘미션 임파서블’이다.

심리학에서 ‘대리 트라우마 이론’이라고 하던가? 이는 전쟁, 가정폭력, 성폭력 등을 겪은 뒤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상담하는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이 상담한 사람들과 유사한 심리적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을 말한다. 나는 대리 트라우마까지는 아니더라도 마음 깊은 곳에 슬픔과 분노가 쌓이면서 몸과 마음의 균형이 깨지는 경험을 한 바 있다. 해답을 얻고자 언젠가 동료들에게 “당신은 왜 이 일을 계속하는가?”라고 묻고 다닌 적이 있었다. 답변은 다 달랐지만 그들은 모두 ‘행복해지기 위해서’ 그 일을 하고 있었다. 예전에 활동가로서 했던 고민을 이젠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하게 된다.

지난주 2학기 수업을 종강했다. 속이 후련하면 좋으련만 아쉬움이 남는다. 안 그래도 이래저래 고민이 많은 20대 학생들에게 또 한 겹의 고민을 얹어주고 무책임하게 떠나가는 건 아닌가 하는 자책감 때문이다. 대학 강의에서 짜릿한 감동을 맛보는 순간은 학생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질문으로부터 출발해서 깨달음을 얻어가는 모습을 지켜볼 때이다. 개념을 익히고 이론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지식은 뭔가 새로운 세계를 알았다는 기쁨과 함께 때론 남들보다 내가 더 많이 안다는 우월감을 주기도 하지만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여성 문제란 그 속에 인간 사회의 보편성을 담고 있기에 어차피 남성이건 여성이건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나는 외부 세계를 이해하는 인식 틀을 통해 학생들 자신의 문제를 발견하고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과정에서 자아의 경계를 확장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강의를 하다 보면 학생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질문을 풀어가다가 어느 순간 지극히 획일적인 이 사회에서 각자가 겪는 삶의 딜레마와 고민들과 직면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지극히 남성 중심적인 발언을 일삼던 남학생조차도 문제의 초점을 자기 자신에게 맞추면 어느새 당당하던 목소리에 힘이 빠지고 고민이 시작된다. 누구보다 평등의식이 높다고 자부하던 학생은 자기 내면 깊이 자리잡고 있는 뿌리 깊은 성역할 고정관념이 어떻게 차별로 연결되는지 자각하고는 당황한다.

여성 문제 혹은 인간 문제를 가르치는 일은 어쩌면 이렇게 학생들을 혼란과 모순, 불안이 가득한 경계선 지역으로 안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수업을 마친 뒤 한 학생은 ‘답답함, 아쉬움, 즐거움, 감동’과 함께 앞으로 짊어져야 할 고민들이 너무 많이 쌓여버린 것 같다고 말했다. 삶의 문제들을 알아가면서 생기는 어려움들이 심리적 외상(트라우마)으로 남는 건 그것들이 고립된 채 소통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쌓이는 고민들을 자기 자신 혹은 타인들과의 소통을 통해 풀어낼 때 인식의 지평은 확장되고 혼란과 모순을 감당할 수 있는 마음의 크기도 함께 자라날 것이다. 그 고민들을 풀어가는 과정이 외롭고 고단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신뢰할 수 있게 되고, 고민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면서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을 확인하게 되길 바란다. 내가 지금껏 그러했듯이 말이다.

권수현/한국여성민우회 <함께 가는 여성>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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