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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곽병찬 칼럼] 조상 뵙기 민망하다

등록 2007-03-27 17:31

곽병찬 논설위원
곽병찬 논설위원
곽병찬 칼럼
15번 국도를 따라 동백꽃이 한창인 선운사 쪽으로 가다 보면, 고창 읍내에서 4㎞쯤 떨어진 곳에 도산리 마을이 나온다. 마을 표시는 없지만, 눈에 익은 탁자형 고인돌 사진과 함께 지석묘 유적지를 알리는 간판이 걸려 있다. 교과서에도 실려 있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으니, 유명세야 선운사 동백꽃에 비길 바가 아니다.

비탈진 골목을 따라 5분쯤 오르면 다시 작은 표지판이 나온다. 표지는 돌계단 위의 농가를 향하고 있다. 계단을 오르면 흙벽이 떨어져 나간 헛간과, 살림집이 나온다. 거의 폐가 수준이다. 개 댓 마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사람 사는 집은 맞는 것 같다. 널찍한 마당은 잡동사니로 어지럽다. 혹시 주인에게 혼날까봐 연신 헛기침을 하며 마당을 오가다 보니, 뒤란으로 이어지는 샛길이 보인다. 뒤란엔 홍매화 서너 그루가 꽃망울을 맺고 있으며, 무성한 동백나무와 대나무 숲이 싱싱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세상에 둘도 없는 유적은 바로 그곳에 숨겨져 있었다. 골치가 띵했다. 문화재 관리가 형편없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스톤헨지 프로젝트란 게 있다고 한다. 영국의 스톤헨지는 기원전 4천년께 고대인들이 태양과 달을 숭배하며 만든 거석 유적지다. 끝 간 데 없는 평원 위에 높이 4.4m의 돌기둥 30여개가 거대한 원형을 이루며 서 있으니 세계 10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꼽힐 만도 하다. 스톤헨지는 그 유명세 때문에 관광객과 차량으로 몸살을 앓아왔다. 보다 못한 반관반민단체 ‘잉글리시 헤리티지’, 민간단체 ‘내셔널 트러스트’ 그리고 영국도로공사는 몇해 전부터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우선 스톤헨지를 지나는 브이(V)자형 도로를 폐쇄하고, 지하 차도로 차가 통과하도록 했다. 스톤헨지 주변의 지상 주차장도 폐쇄했다. 진동과 매연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다. 대신 스톤헨지로부터 3㎞ 떨어진 곳에 방문객 센터를 세워 주차장 등 편의시설을 모아놓는다. 스톤헨지까지는 비궤도 열차로 오가도록 했다. 모두가 유적 보호에 초첨이 맞춰져 있다.

선사시대의 돌무덤인 고인돌은 세계적으로 6만여기가 확인됐다. 이 가운데 무려 3만여기가 한반도에 집중돼 있다. 고창엔 북방식과 남방식 440여기가 밀집해 있다. 특히 도산리의 탁자형 고인돌은 한반도에서 가장 남쪽에 자리잡은 북방형으로서 학술적 가치가 높다. 여러 고인돌 가운데 탐방객의 발길을 잡는 것도 이 탁자형 고인돌이다. 그러나 탐방객은 스톤헨지 못지않은 그 의젓한 자태 때문에 우선 놀라지만, 그것을 그렇게 방치한 정부의 무관심에 더 놀란다.

방치의 직접적 원인은 보상비에 있다. 정부는 1994년 이곳이 사적 391호로 지정된 이래 이 농가를 매입하려 했다. 지상 유물은 국가 소유이므로 고인돌에 대해서는 보상할 이유가 없고, 토지와 가옥에 대해서만 공시지가로 보상하겠다고 했다. 7대에 걸쳐 이곳을 지켜온 김아무개씨가 이런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일 리 만무다. 그 돈으로는 읍내에서 변변한 집 한 채 사기도 힘들다. 게다가 조상들이 200년 넘게 애지중지 보살펴온 고인돌이고, 조상들의 피와 땀이 배어 있는 살림집이다. 그동안 김씨는 나라의 체면도 있고 하니 살림집을 마당 앞쪽으로 이전해 고인돌 주변을 정리하라고 요청했다. 그것도 안 되면 자신의 생활권인 전주나 익산으로 옮길 수 있도록 이주비를 요구했다. 그러나 법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선운사 동백꽃에 들이는 비용과 비교된다.

관리들의 편의주의야 어제오늘 일이 아니니 그렇다 치자. 그러나 국민 모두를 수치스럽게 만드는 것까지 참을 순 없다.

곽병찬 논설위원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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