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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나라살림가족살림] 이제 ‘시간주권’을 말하자 / 강수돌

등록 2007-04-13 17:50

강수돌/고려대 교수· 조치원 신안1리 이장
강수돌/고려대 교수· 조치원 신안1리 이장
나라살림가족살림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근무하다 보면 은행을 이용할 틈을 내기가 어렵다 … 늦게 퇴근하는 직장인이 편하게 은행 업무를 볼 수 있도록 오후 늦게 또는 휴일에도 일정 시간 은행 문을 열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최근 금융노조가 은행 창구 영업을 1시간 단축하려 한다. 위 인용은 금융노조의 요구에 반론을 펴는 20대 여성의 심정이다. 금융노조의 은행 노동자 역시 위 20대 여성 노동자 못지않게 노동강도가 높고 업무 부담이 커 과로사 위험까지 있다 한다. 은행에서 창구 영업은 오후 4시 반까지 하고 문을 닫는다. 하지만 그 닫힌 문 뒤에선 그 날의 모든 정리 작업을 하느라 대개 밤 10시가 넘어야 퇴근한다고 한다.

위 여성 노동자의 말을 인용해 반론을 펴는 이는 “국민은행은 2조4700억원의 순익을 거뒀고 우리금융지주 역시 2조100억원의 순익을 거두며” 눈부신 발전을 하면서도 “금융 서비스의 질 향상으로 국민에게 되돌려주는 일에 관심이 없음”을 한탄한다. 이 상황에서 노조가 ‘근무시간 줄이면 되지’ 하는 어린아이 같은 이기적 선택이 아닌 좀더 ‘구조적인 접근’을 하기를 촉구한다. 이에 가세하듯 어느 신문에선 홍콩과 영국 은행들이 평일 근무시간을 오후 5시까지 연장하거나 토요일 영업도 한다고 보도했다. 시내 중심가엔 아침 8시 반부터 오후 6시 반까지 열기도 한단다. 심지어 미국 뉴욕의 맨해튼에선 아침 7시 반부터 저녁 8시까지 문을 연다고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소비자의 편리성 요구와 노동자의 인간성 요구가 충돌함을 본다. 과연 이 둘을 조화시킬 방도는 없는가? 있다. 그건 영업시간과 노동시간을 분리하는 길이다. 영업시간은 늘리되, 개별 노동자의 근무시간은 줄인다. 어떻게? 그것은 곧 노동자 수를 늘려 교대제로 운용하면 된다. 이 때 아무 문제가 없는가? 예컨대 은행 경영진들의 저항이 예상된다. 노동력을 극도로 절감하고 긴축하여 겨우 수익성을 높였더니 증원이라니, 돈 안 되는 논리가 아닌가. 그래서 이해관계 충돌은 피할 길 없다. 결국 이 부분은 노사와 더불어 시민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풀어야 할 과제다.

한편, 이 논의들에서 빠진 것이 있다. 그것은 ‘모두가’ 덜 일해서 사회 전체적으로 삶의 질을 드높이자는 아이디어다. 은행 영업시간을 늘려 장시간 근로를 하는 이들에게도 문을 열자가 아니라, 장시간 노동자도 일을 줄이고 은행도 시간을 줄여 모두 조금씩 여유를 늘리도록 하자는 제안이 필요하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주5일제를 하기 전엔 ‘토요 휴무’라면 세상이 무너질 것 같았지만 막상 토요일에 놀아도 세상은 역시 잘 돌아가는 이치와 같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이번 금융노조 제안은 단순히 은행 노동자들만 편히 살려는 이기적 발상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삶의 질을 드높이기 위한 출발점이란 의미가 있다. 은행부터 시간 단축을 하면 사람들은 삶의 패턴을 새 기준에 맞게 조절해 삶의 균형을 다시 잡을 수 있다. 물론 잊지 말 것은, 노동시간 단축으로 사람들이 생존의 벼랑으로 몰리지 않게 여러 조건들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게으름에 대한 찬양>의 버트런드 러셀처럼 마을 단위로 공동육아, 공동식당, 마을의료를 구축해 ‘돈 안 드는’ 삶의 틀을 만들 수 있다. 이게 돼야 언젠가는 공장 노동자, 은행 노동자 가리지 않고 이른 오후에 아이들과 공원에서 삶의 여유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노동시간 단축과 삶의 시간 확충에 모두 힘을 합쳐야 하는 까닭이다. 국민주권 이상으로 ‘시간주권’이 중요하니까.

강수돌/고려대 교수· 조치원 신안1리 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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