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
곽병찬 칼럼
생께서는 60년 전 우리 겨레가 지켜야 할 철학의 뼈대를 ‘나의 소원’에 담아 <백범일지>에 첨부했습니다. 독립운동 시절 유서를 대신해 기록했다는 <백범일지>는 이 글로 말미암아, 선생의 풍모와 경륜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선생께서 소원하던 나라는 부강(富强)한 나라가 아니라 ‘아름다운 나라’였습니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 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선생께서 정치이념으로 자유를 특별히 강조한 것도 결국 문화의 백화제방을 위함이었습니다. “나는 어떠한 의미로든지 독재정치를 배격한다. 산에 한 가지 나무만 나지 아니 하고, 들에 한 가지 꽃만 피지 아니 한다. 여러 가지 나무가 어울려서 위대한 삼림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백 가지 꽃이 섞여 피어서 봄의 풍성한 경치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에는 유교도 불교도 예수교도 자유로이 발달하고,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 다 들어와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니, 이런 나라에서만 인류의 가장 크고 높은 문화가 발생할 것이다.”
선생께서 ‘나의 소원’을 쓰실 때의 나라 형편을 생각하면, 이런 생각이 탁월한 혜안인지 값싼 감상인지 헷갈리곤 했습니다. 국민소득이 처음 집계된 1953년의 1인당 국민소득은 67달러였으니, 47년 당시의 궁핍은 말할 나위 없었습니다. 지금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최빈국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지난해 우리 1인당 소득(1만8372달러)의 0.3%에 불과합니다. 당시 국민총생산은 473억원이었습니다. 오늘날 한 중견기업 매출 규모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오로지 문화의 힘, 곧 아름다운 대한민국을 소망했으니, 범인으로서야 어찌 쉽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설마 60년 뒤, 즉 유럽연합을 이끄는 새로운 동력으로 문화산업이 떠오를 줄 예상했을 리도 없을 겁니다. 2005년 유럽연합의 문화산업 시장규모는 3750억달러였습니다. 한때 유럽을 이끌던 자동차 산업 총매출액의 두 배에 이릅니다. 고용인구 또한 580만여명에 이르고 매년 1.85%의 새 일자리를 창출한다니, 현재 고용인구 500여만명에서 매년 줄어드는 자동차 산업과 대조를 이룹니다.
이제 새 대통령을 뽑는 해가 되었으니, 선생은 다시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게 됐습니다. 대통령을 꿈꾸는 이들 치고 선생을 사표로 삼지않는 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손학규씨는 백범기념관에서 정치생명을 건 탈당선언을 했습니다. 이명박씨는 청소년들에게 <백범일지> 특히 이 가운데 ‘나의 소원’을 꼭 읽도록 당부하곤 한답니다. 김근태·정동영씨는 선생의 뒤를 따라 휴전선을 베고 눕겠다고 장담합니다.
선생을 따르겠다는 이들의 다짐이야 어찌 나무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선생이 소망하셨던 문화의 힘은 찾아볼 수 없으니 의구심이 듭니다. 혹시 선생에 대한 국민의 존경심을 도용하려는 게 아닐까? 이들이 오로지 되뇌는 건 경제 대통령입니다. 세계 11위의 무역대국, 경제력 12위의 대한민국을 이끌겠다는 이들의 입에서 나오느니 ‘못살겠다, 잘살아 보자’ 뿐입니다. 이래서야 어찌 선생의 뒤를 따를 것이며, 나라를 제대로 이끌겠습니까.
그래서 선생께 부탁드립니다. 찾아오면 이렇게 넌지시 말씀해 주십시요. ‘나의 소원’(11쪽밖에 안 된다)이라도 한 번 읽은 뒤 나의 이름을 입에 올리라고. 이제 우리는 행복을 말하고, 문화를 꿈꾸는 대통령을 맞을 때도 되었습니다.
곽병찬 논설위원chankb@hani.co.kr
곽병찬 논설위원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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