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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한국사회] 밤길의 사람들 / 이명원

등록 2007-04-18 17:46

이명원/문학평론가·<비평과 전망>편집주간
이명원/문학평론가·<비평과 전망>편집주간
야!한국사회
상념이 깊어질 때면 발걸음은 느려졌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일부러 먼 우회로를 선택하곤 했다. 20대의 한 시절에는 막 도착한 집의 대문 앞에서, 뜰에 핀 목련꽃을 처연히 바라보다가, 봄밤의 거리로 다시 발걸음을 되돌리기도 했다. 문 앞에서 나는 무얼 그리 망설였던가.

명동성당 층계를 느린 보폭으로 오르내렸다. 성당에 들어가 기도하고자 했으나, 늦은 밤 성당의 문은 잠겨 있었다. 그래서 기도하듯 층계를 오르내린 것이다. 수위실의 아저씨가 궁금한 듯 목을 길게 빼고 의혹의 눈길을 던졌다. 그런 심야에는 예수조차도 성당을 방문하는 것은 삼갈 일처럼 느껴졌다.

청계천 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늦은 밤인지라 물소리가 제법 청아하게 들렸는데,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다만 운동복을 입은 한 사내가 땀을 흘리며 청계천을 달리고 있었다. 같은 시간에 대다수의 도시인들은 헬스클럽의 러닝 머신 위를 달리고 있을 것이다. 유산소 운동이라고 하던데, 빌딩 안의 공기는 안녕한지 궁금하다.

길가 포장마차에 들어갔다. 우동을 한 그릇 시켜 먹는데, 옆 자리가 방자하게 시끄럽다. 벌건 표정의 세 남자가 흐트러진 넥타이차림으로 소주를 먹고 있었다. “그 자식은 내 선배도 아니다. 어떻게 나를 이다지도 무시할 수 있나.” 귀가 열려 있어 들으니, 같은 회사의 동문 선배인 이사가 자신에게는 밥 한번 사주지 않더라는 것. 직장생활의 복마전 속에서 학연과 지연은 훌륭한 안전판인데, 자신은 기대할 것이 없더라는 이야기.

포장마차를 나와 광교 쪽으로 걷는데 섬뜩한 통곡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넥타이를 맨 중년의 한 사내가 무릎 사이로 고개를 처박은 채 통곡하고 있었다. 앞머리가 벗겨진 다른 중년의 사내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사내의 울음을 거의 껴안듯이 달래고 있었다. 비정한 도시의 빌딩 숲에는 중년의 사내만 울고 있는 게 아니었다.

몇 걸음 더 나아가니 단정하게 투피스를 입은 한 젊은 여성이 ‘철퍼덕’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것처럼 길바닥에 두 다리를 쭉 뻗은 채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힘없이 어깨에 걸쳐진 핸드백도 함께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멍했다. 슬픔에도 이른바 ‘안전거리’라는 것이 있는 듯. 사람들은 흘끗 쳐다보다가는 고개를 숙이고 제 갈 길로 성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 옆 차도에서는 한 성난 젊은이가 달리는 택시를 위태롭게 몸으로 막아, 운전기사와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이 청년 역시 다소 취한 상태였는데, 단거리의 취객을 태우지 않는 택시 기사에 대한 분노를 그렇게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취한 욕설이 거품을 일으키며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때서야 갑자기 많은 택시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밤길의 사람들을 생각했다. 명랑한 태양이 떠오르면, 울고 있던 중년사내는 중후한 표정으로 부하 직원들의 결재서류에 사인을 하고 있을 것이다. 선배를 규탄했던 그 사내는 이사님 안녕하십니까, 하고 자신이 후배사원이라는 암시의 눈도장을 계속 찍을 것이다. ‘철퍼덕’ 거리에 앉아 있던 한 여성은 세탁소에 옷을 맡기며, 지난밤의 기억을 지우고자 애쓸 것이다. 택시기사와 싸웠던 그 청년은 숙취와 함께 파출소에서의 아침이라는 난감함에 직면할 것이다.


밤길의 사람들은 왜 슬픈가. 그 슬픔은 비정한 도시가 흘리는 눈물처럼 보인다. 산다는 일은 왜 자주 굴욕적인가. 야, 한국사회. 너 한번 대답해 봐라. 밤길의 사람들은 그렇게 이완된 밤의 슬픔 속에서 묻고 있다.

이명원/문학평론가·<비평과 전망>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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