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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나라살림가족살림] 민족적 생활양식의 복권 / 류동민

등록 2007-04-27 17:43

류동민/충남대 교수·경제학
류동민/충남대 교수·경제학
나라살림가족살림
요금은 비싸도 서울까지 한 시간 남짓이면 도착하는 맛에 부쩍 고속철도를 이용하는 일이 많아졌다. 전국 어디서나 비슷한 디자인의 쾌적한 고속철도역 부근은 삶의 무게로 최소한의 자존심을 유지하는 것조차 버거운 노숙자들로 넘쳐난다. 행동경제학 쪽 연구 결과, 경제학자들은 자선이나 기부행위 등에 상대적으로 인색하다고 한다. 스무살 무렵 처음 경제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경제학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학문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요즘은 문득 암호와도 같은 수식과 그래프 속에서 어정쩡하게 헤매기보다는 차라리 노숙자에게 일용할 소주 한 병이라도 사 주는 것이 쓸모있는 일이 아닐까, 자괴감에 젖곤 한다.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위한 요소로서 사회적 자본의 역할을 강조하는 논의들이 많다. 최근에 읽은 어떤 글에서는 사회적 자본을 “어떤 사람이나 집단이 다른 사람 또는 집단에 대해 갖는 동감, 그리고 단지 교환관계를 통해 기대되는 것을 넘어서 다른 사람이나 집단을 우선적으로 취급하는 것”이라 설명한다. 그렇다면 사회적 자본이란 거창한 개념도 결국은 아주 오래 전 애덤 스미스가 <도덕감정론>에서 얘기했던 다른 사람의 처지와 자신의 처지를 동일시함으로써 느끼게 되는 감정, 결국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과 다를 바 없다.

1970∼80년대의 재야 경제학자 박현채는 <민족경제론>에서 민족적 생활양식이라는 개념을 강조하였다. 그는 우리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역사적 미래와 운명을 같이하고자 하는 자각, 그리고 공동체 구성원 개개인의 연대감이 바로 민족적 생활양식에 대한 요구라고 말한다. 굳이 민족만이 변하지 않는 공동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면, 세계화 시대에 민족경제가 그 무슨 가당치도 않은 얘기냐고 눈부터 부라릴 필요는 없다.

작금의 한국경제는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와 영세 자영업자의 희생에 기초하여 굴러가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쾌적한 대형할인점에 자동차를 몰고 가서 소비자로서의 즐거움을 만끽하면서 구입하는 제품의 저렴한 가격은 궁극적으로는 그들의 희생에 기초해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박현채의 용어를 빌려 표현하자면 우리의 삶의 기반인 민족적 생활양식이 무너지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마치 국가 대표선수의 올림픽 금메달이 결코 우리 생활체육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것이 월마트와 맞장 떠서 이긴 자랑스러운 국산 브랜드의 대형 할인점이라 하더라도 실제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시장경쟁에서 패배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 그것은 이른바 ‘좌파’정권이 보장해 주는 것도 아니고, 7% 아니라 17%의 성장을 하더라도 자동적으로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시장이 아니면 정부 개입이고 정부 개입은 곧 좌파라는 황당한 삼단논법이나, 규제의 고삐만 풀어 버리면 시장은 성장으로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는 사이비 종교의 복음과도 같은 주장을 넘어서서, 시장은 공공성의 논리 없이는 제대로 굴러갈 수조차 없다는 점, 최소한의 공공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성장은 결국 지속적인 성장은 차치하더라도 사회적 안정조차 확보하기 어렵다는 점이 우리 모두의 몸에 체화되어야 한다.

경제학이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라 믿던 시절, 나는 모든 것이 내 탓이라는 종교적 참회는 현실의 모순을 은폐할 뿐만 아니라 그 원인을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지극히 보수적 이데올로기라는 점에 분개했다. 그러나, 그 어떤 진보적 대안도 결국엔 역전의 노숙자로부터 비정규직 노동자에 이르는 무너져 가는 민족적 생활양식의 구성원들에 대한 동감과 배려로부터 출발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류동민/충남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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