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명섭 책과 생각 팀장
유레카
〈말〉은 장 폴 사르트르(1905~1980)의 자서전이다. 사르트르 전기를 쓴 안니 코엔솔랄은 이 책을 묘사할 때 극한의 수사를 끌어들였다. “단도직입적이고 탁월하고 절대적인 〈말〉은 설명과 주석에 거의 여지를 남겨주지 않는다. 그것은 대조가 강한 기법들로 독자를 사로잡고 흥분시키며 넋을 빼앗고 열광시키며, 결국엔 충격받은 독자를 내동댕이치는 강력하고 독단적이고 유혹적이고 저항할 수 없는 책이었다.” 어린 날 외할아버지 서재를 놀이터로 삼았던 사르트르는 기억의 밑바닥을 굴착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의 종교를 발견했다. 나에게 책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어 보였다. 서재에서 나는 하나의 사원을 보았다.” 말들이 모여 책을 이루고 책이 모여 세계를 이루었다. 사르트르는 그 안에서 보낸 삶을 요약해 ‘말’이라고 이름짓는다.
김훈씨의 소설 〈남한산성〉이 출판 시장을 달구고 있다. 이른바 ‘작품성’과 ‘대중성’이 행복하게 만난 경우다. 이 소설의 인물들은 폐쇄된 시·공간 안에서 움직인다. 앞뒤를 생략해버린 47일의 시간이 닫힌 성 안에서 흐른다. 인조반정에서 정묘호란까지 병자년의 치욕을 예비한 사건들은 소설의 시간 밖에 있다. 단절된 시·공간은 작가에게 조작 가능성을 허용한다. 그 실험실 같은 공간에 인물을 배치해 놓고 작가는 ‘말’과 ‘삶’을 대치시킨다. “말로써 정의를 다툴 수 없고, 글로써 세상을 읽을 수 없다.” 말은 삶 바깥에서 “신기루”로 흩어진다. “내행전 마루에서 말들이 부스러졌고, 부딪쳐서 흩어졌다.” 소설 구도 안에서 말은 삶과 만나지 못한다. 말은 헛것이고 삶이야말로 실체다. 그러나 그 작가가 그려놓은 ‘말의 권력자’ 정명수를 보면, 사태는 정반대다. 여진과 조선 사이를 통역하는 정명수는 말로써 삶을 산다. 말은 따로 있지 않고 삶 속에 있다. 말이 곧 삶이다. 이 경우엔 사르트르가 옳다.
고명섭 책과 생각 팀장 michael@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