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남구 논설위원
유레카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는 1889년 영국에서 태어났다. 1907년 캐나다로 건너가 농장에서 일하며 학비를 벌어 이듬해 토론토대학교 온테리오 수의과대학에 입학했다. 2학년 때 소아마비에 걸려 왼쪽 팔다리가 마비됐다. 주 보건국 세균학연구소 조수로 일하다 박사학위를 받고 1914년 토론토 대학 강사가 되었다.
1916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애비슨 교장의 제안을 받고 선교사로 식민지 조선에 건너와, 세균학과 위생학을 가르쳤다. 3·1 만세운동을 준비하던 젊은이들의 부탁을 받아들여 국제 정세를 국내에 알리는 일을 도왔다.
만세운동의 현장을 카메라에 담았다. 수원 제암리 참사 소식을 듣고는 불편한 몸으로 홀로 달려가 사진을 찍고, 주민들의 증언을 기록했다. 투옥된 이들을 찾아 돌보고, 일제의 잔혹한 고문에 항의했다. 그런 활동으로 4년 만에 사실상 추방을 당했다. 캐나다로 돌아가서는 3·1 운동의 전모를 세계에 알리고 일제의 비인도적인 처사를 고발했다.
온테리오대 교수직을 은퇴한 뒤, 1958년 칠순의 나이로 다시 한국에 건너와 서울대 수의과대학에서 가르쳤다. 이승만 정부의 부정과 독재를 비판하고, 4·19 혁명을 격려했다. ‘손자’라 부른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을 비롯해 많은 젊은이의 벗이요, 스승이요, 후원자였다. 외국인으론 처음으로 대한민국 문화훈장과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구두 한 켤레, 책 한 권까지 모두 나눠 주고, 1970년 영면에 들어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됐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는 미국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의 주인공 마이클 스코필드(웬트워스 밀러)를 사람들은 ‘석호필’이란 애칭으로 부른다. ‘3·1 운동의 34번째 민족대표’라 불리는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가 ‘돌(石)같이 굳은 의지를 가진, 호랑이(虎)같이 무서운 사람, 어려운 사람을 돕겠다(弼)’는 뜻을 담아 지었던 한국식 이름이다.
정남구 논설위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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