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구 논설위원
유레카
생텍쥐페리는 “사람은 각자가 하나의 제국”이라고 <인간의 대지>에서 썼다.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 가치를 지녔다는 뜻에서다. 갱도가 무너져 한 광부의 머리 위를 덮쳤을 때, 그를 구하려다 열 명이 죽을지도 모를 일이나 그런 수치 계산은 유치하다고, 우리는 그 광부를 구해야 한다고 했다. 그의 글은 아름다우나, 그것만으로 명쾌한 답을 내릴 수 없는 상황도 있다.
1840년 캐나다 래브라도 해안에서 40여명이 탄 배가 난파했다. 사람들은 12명이 겨우 탈 수 있는 구명보트에 모두 올라탔다. 폭풍우가 몰려왔다. 몇몇은 스스로 바다로 뛰어들었지만 나머지도 보트가 감당할 순 없었다. 선장은 고심 끝에 폭풍우를 견뎌낼 수 없을 듯한 노약자부터 내리게 했다. 생텍쥐페리라면 어떻게 했을까? 보트에 남은 이들은 구조됐다. 법정은 선장에게 ‘학살죄’를 물었다.
인질극도 우리를 도덕적 딜레마에 빠뜨린다. 납치범이 인질 석방의 대가로 돈을 요구할 때, “그까짓 돈이 문제냐”고 말하기는 쉽다. 하지만 납치범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하고, 또다른 인질극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납치범과는 어떤 타협도 하지 않는 게 도덕 원칙에 더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무력으로 인질을 구하려면 희생이 더 커질 수 있다. 인질 살해 위협 앞에서 우리가 평온할 수도 없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해법이 과연 있을까?
한국인 23명을 납치한 아프가니스탄 무장단체 탈레반이 두 명의 인질을 살해했다. 그래도 누군가는 납치범과 더 협상을 벌이고, 어차피 완벽할 수 없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 결과가 나쁠 때, 우리는 협상 대표를 희생양 삼아 자신의 양심을 달래고 싶을지 모른다. 그러나 죄없는 생명을 목적 달성의 수단으로 삼은 범죄를 먼저 단죄하지 않는 한, 그것은 비겁한 일이 되고 만다.
정남구 논설위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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