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원/문화평론가
야!한국사회
쓴다. 장전된 총 앞에서, 흐느낌으로 또 애통함으로. 그리하여, 쓸 수밖에 없다. 장전된 총 앞에서, 전능한 창조자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라마사박다니. 그리하여, 애통하다. 장전된 총 앞에서, 총이 총을 낳고, 칼이 칼을 낳고. 한 슬픔은 더 큰 슬픔을 불러오고, 찢긴 종잇장처럼 예리한 상처는 또 핏빛으로 번지고, 범람하는데.
당신들의 분노가 또다른 폭력을 불러오고, 우리들의 무심이 세상의 어둡고 낮은 곳에서 다른 이의 애절한 통곡들을 낳고 있다. 다시 쓴다. 장전된 총 앞에서, 오히려 당신들의 발에 입 맞추던 계절은 가고 없는 건가. 장전된 총 앞에서, 오히려 꽃을 건네던 온유한 계절은 가고 없는 건가.
당신들의 깊은 슬픔과 분노와 치욕과 고통을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당신들이 만들어낸 더 깊은 슬픔과 분노와 치욕과 고통이 우리에게 다가왔는가, 왔을까, 더 올 것인가. 장전된 총 앞에서, 모자를 벗고 향불을 사른다고, 차라리 악몽조차 사라지지 않는다.
비통한 죽음 앞에서, 모든 언어들은 추문으로 전락하고, 우리들은 다만 단말마의 비명으로, 말이 되지 못했으므로 범람하는 눈물과 몸부림만 있을 뿐이다. 그래도 쓴다. 장전된 총 앞에서, 보이는 총과 보이지 않는 총 앞에서. 세상의 모든 죽어가는 것 앞에서, 사랑과 평화가 무력한 기도가 아니기를, 그렇게 바라면서.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의 젊음들이 죽어가고 있다. 그런 그들을 생각하면, 늦은 밤까지 잠이 오지 않았다. 한 생애의 끝은 거룩하고 존엄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드리운 죽음의 장막 앞에서, 각자의 신에게 드리는 기도는 얼마나 무력한 것인가.
장전된 총 앞에서 한 편의 시는 대단히 무력한 것이어서, 하늘을 우러르는 것도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걷겠다는 다짐도, 또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하겠다던 앞선 시대 윤동주의 결연한 고백도 임박한 비극 앞에서는 때로 사치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겠다.
그러나 보이는 총만이 죽음의 무기인 것은 아니어서, 무심하게 범람하는 관료화된 언어들은 사람들의 무딘 마음을 더욱 냉소적으로 만들고 있다. 그 전쟁은 우리가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 21세기를 끝없는 전쟁과 공포, 광기와 복수로 물들이고 있는 그 전쟁은 온전히 조지 부시의 것이다. “테러와의 타협은 없다”고 외치는 미국 국무부의 성명서는 전쟁수행의 관료화된 면죄논리일 뿐, 각각의 고유한 죽음과 생명 앞에서의 경외심이란 찾아볼 수 없다.
많은 한국인들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임박했을 때, 촛불을 들고 평화를 기원했다. 바람에 무력하게 흔들리는 촛불은 이 기술파시즘 시대에 평화가 놓여 있는 가감 없는 상황의 상징일까. 제 몸을 태워 빛을 밝혀 외풍에 한없이 흔들리다 꺼져버린 촛불을 나는 기억한다. 죄에 동참하지 않고도 죄의식을 느꼈던 민감한 영혼들이 영문 모르는 전쟁의 참화 속에서 짓밟히고 있다.
장전된 총 앞에서, 세상의 모든 촛불들은 제 몸을 태워 평화를 갈망하고 있다. 그 촛불은 이 세상의 모든 총을 녹여, 쟁기와 보습과 호미로 다시 태어나라고 호소하고 있다. 장전된 총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그러나 우리는 끈질기게 세상을 향하여 장전된 총을 치우라고 말해야 한다. 동시에 우리들이 장전하고 있는 또다른 총을, 그리고 당신들을 향해 겨누어진 이 세상의 모든 총을 치우라고, 시인처럼 말해야 한다. 단말마의 비명일지라도, 시인의 마음으로 이 세계의 비참에 대해 통곡해야 한다.
이명원/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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