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이정/미술평론가
야!한국사회
지난 6월 6·10 항쟁 20돌 행사를 구경 간 적이 있다. 20년 전 고교생 신분이던 나는, 1987년 상반기를 그저 대학생 두 명의 상징적 타살 사건과 직선제 수용이라는 언론의 요란함이 팽팽하게 연결된 세 점으로 인식했을 뿐, 세 점을 잇는 일직선 위로 얼마나 중대한 점들이 산재되었나는 알 수 없었다. 해서 그 재현 현장을 참관하고 싶었던 거다.
그날 시국춤의 주인공 이애주 교수가 춤꾼들과 재현한 ‘상생 평화의 춤’은 행사의 주요 볼거리로 보도되었고, 20년 전 그곳에 없었던 나로선 몹시 궁금한 광경일밖에 없었다. 언론은 그날 행사를 “6월의 아픔과 고통의 역사를 상생평화의 미래로 승화시키자는 메시지”로 타전했지만, 현장을 지켜본 이의 인상은 사뭇 다르다.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6·10 체험자이기보다, 가족 단위 관람객이 압도적으로 많은 탓에, 공연자와 관전자 사이에 형성되어야 할 공감의 시너지를 기대하기란 불가능했다. 때론 일부 민중가요가 군무의 반주로 선곡될 때, 춤꾼들이 관람자의 합창을 유도했으나 번번이 무위로 돌아갔다. (구경 온 나른한 시민들이 가사를 제대로 알 턱이 없었다.)
한편, 열사의 이름을 차례로 외치는 이애주 교수의 연출은 87년 문익환 목사가 출옥 직후 행한 것의 재현이었을테지만, 20년 시차를 극복할 수 없어 따분했고 때론 신파조로 들렸다. 물론 불운한 과거를 공공연히 망각하는 현세를 경계하자는 취지의 추모행사란 당대적 환심을 구하기 어렵다. (더구나 위에 토로한 불만을 보완할 추모행사 개선안이 내 머리로도 당최 그려지지 않는다.)
장황한 서두였는데 이 글의 요체는 전위를 갈망해 온 예술이 시대 변화에 맞춰 당대적 호소력과 세련됨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홉스봄은 98년 어느 기념 강연에서, ‘아방가르드의 쇠퇴와 몰락’이란 주제를 택해, 서구 진보적 미술운동의 과제가 마치 당대성인 듯하나 “기계와 모더니티를 표현하는 수많은 방법 중 기계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 외에는 공통점이 없고 … (중략) … 굽이치는 선보다 직선을 더 선호한다는 것 외에도 공통점이 없다”며 평가절하했다. 예술적 전위는 당대성 유무로 판가름하는 것이 정설이다. 급변하는 세태에 동참했는지, 미래적 비전을 제시했는지가 관건이란 얘기다. 미술사도 예외는 아니어서, 빛과 광학을 도입한 인상주의, 속도를 상찬한 미래주의, 다시점을 개척한 입체주의를 이들보다 구체적 진보성에서 조형 원리로 유추한 러시아 구성주의나 바우하우스와 함께 전위 예술의 시조로 곧잘 분류한다. 심지어 시각예술이 당도한 가장 모던한 순간에 추상 미술을 추대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 무엇도 진술하지 않는 침묵의 예술이 어떤 연고로 전위의 선봉장 대접을 받게 된 걸까? 홉스봄의 해석은 이렇다. 냉전시대 이전에는 터무니없는 가격에도 거래되지 않던 추상미술을 하필 히틀러와 스탈린이 혐오한 덕에, 아이러니컬하게도 전체주의에 반하는 자유세계의 공식 미술 대우를 받았다고. 설령 홉스봄의 해석이 지나쳤다고 양보한들 현실이 달라지진 않는다. 지난 구체제를 변혁한 걸로 평가된 전위 예술의 거개는 미술관이 규정한 분류체계 아래 무력하게 박제화되어 신중한 교양인 관객을 맞이하고 있는 실정 아닌가. 아방가르드가 전지전능한 관념으로 변질된 흔해 빠진 전례들은 과거 행적의 진정성마저 훼손한다. 80년대 투사적 원고를 토해낸 미술비평가 유홍준은 후일 문화예술계의 최고 권좌에 오른 후, 때론 입방아에 올랐고 근자에는 자신의 저서 수천만원어치를 문화재청 예산으로 구입·배포한 혐의로 다시 회자되었다. 규모는 다르나 전위가 변질된 유사한 경로를 드러낸 셈이다. 예술적 아방가르드가 진정성과 품위 모두를 지키며 생존하는 해법을 고민하는 순간이면, 꼭 이런 보도와 만난단 말이다.
반이정/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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