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찬 논설위원
곽병찬칼럼
‘이명박 장로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다.’ 평범한 문장이다. 주어의 종교적 속성을 드러낼 뿐이다. 그러나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라는 말이 문장 앞에 붙는 순간 상황은 급변한다. 졸지에 불온한 징후를 예고하는 선언적 문구가 된다. 불행한 역사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기독교 국가를 세우려 했다. 자신의 뜻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던 그는 장기 집권을 획책하다 망명길에 올랐다. 그의 재임 기간 중 한국 불교는 비구·대처 전쟁으로 난장판이 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자신을 사도쯤으로 생각했다. 그는 이전의 독재자들도 주저했던 명동성당의 침탈을 강행했다.
이 후보에게서 불온한 징후를 읽는 건 과민반응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공직에서 정치적 신념과 종교적 신앙을 혼동했던 모습들은, 이런 예감을 떨치지 못하게 한다. 사실 대권을 노리는 유력 정치인치고, 그만큼 종교적 활동에 열심이었던 사람도 드물다. 그는 서울시장 재임 기간에 대규모 개신교 행사에 50여회 참석했다. 교회 부흥과 선교를 다짐하는 ‘어게인 1907’ 관련 행사엔 거의 빠지지 않았다. 2004년 이 행사에선 ‘수도 서울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거룩한 도시이며, 서울의 시민은 하나님의 백성’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한다’는 내용의 봉헌사를 낭독했다. ‘사찰 붕괴 기도’로 논란이 많았던 지난해 ‘어게인 1907 부산’에는 영상메시지를 보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산을 축복한다’고 말했다. 청계천 복원을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라고 간증하기도 했다. 천여년의 시행착오 속에서 확립된 정교분리의 원칙을 흔드는 행태가 아닐 수 없다.
인류에게 불행을 가져왔던 종교의 정치화는 대개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독일 교회가 히틀러에게 충성을 바쳤던 것처럼 독재자에게 부역하는 경우가 하나고, 탈레반처럼 종교와 정치를 일체화하려는 것이 다른 하나다. 후자의 경우 종교적 근본주의가 정치화할 때, 즉 종교적 교리와 이상을 이 세상에 실현하려고 할 때 나타난다. 신정정치를 표방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뿐 아니라, 부시 정권과 함께 전면에 등장한 미국의 기독교 신보수주의자들이 추구해온 것이다.
종교의 정치화는 사랑 자비 헌신 희생 화해 일치라는 종교적 가치를 증오 분열 탐욕 불화로 전복시킨다. 종교적 도그마가 정치적 독선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부시는 지금까지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침공을 악에 대한 심판, 곧 이념전쟁으로 주장했다. 이에 대해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이렇게 비판했다. “세속주의는 되돌릴 수 없는 흐름이다. 그러나 종교와 정치가 결합하는 퇴행적 현상이 일어나는 곳이 있으니,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미국이다.” 미국은 인구의 80% 정도가 기독교인이니 그럴 만도 하겠다지만, 개신교도가 20%에도 미치지 못하는 우리나라에서 종교의 정치화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과거의 독재자들도 종교의 정치화를 극력 피했다.
나치가 사형한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는 단지 하나님을 숭배하거나, 하나님을 창조자로 믿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기독교적 윤리를 인간의 행동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평생 자신이 신앙하는 종교적 가치를 실천에 옮겼던 만해 한용운 스님은 시집 <님의 침묵> ‘군말’에서 이렇게 썼다. 올해 만해축전의 주제어이기도 했다. “님만 님이 아니다. 기룬 것은 다 님이다. … 나는 해 저문 들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羊)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 그립고 애틋한 것은 모두 (부처 혹은 하느)님이라니!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이명박 장로의 신앙고백이 되기를 기대한다.
곽병찬 논설위원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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