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훈/‘공감’ 변호사
야!한국사회
‘철학은 충격과 망설임에서 시작된다.’ 2차 세계대전의 참혹한 경험과 대면한 한 철학자의 말이다. 그리고 나는 인혁당 사건이라는 ‘충격과 망설임’을 통해, 한국 사법의 새로운 역사가 이제 시작되고 있다고 말하려 한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 판결이 선고된 1975년 4월9일은 ‘사법 사상 암흑의 날’로 평가된다. 대법원은 추악한 권력의 주문을 그대로 판결로 받아썼고, ‘사법에 의한 살인’을 통해 법원 스스로 ‘사법을 살인’했다. 이중의 의미에서 ‘사법살인’이었고, 판결과 체제의 장막 뒤에서 사법의 죽음을 확인하는 충격적 순간이었다.
2007년 8월21일, 32년의 긴 망설임 끝에, 의문사위원회의 직권조사와 재심 판결을 거쳐 법원은 자기 성찰에 이르렀다. 과거의 법원을 법정에 세우고, 그때의 심판자들을 간접적으로나마 심판함으로써 과거의 불법과 부정의를 반성적으로 선언한 판결이 선고되었다. 국가배상을 인용한 이번 1심 법원의 판결은 재심 법원의 무죄 판결과는 다른 적극적 의미를 가진다. 재심 법원은 재심이라는 비상적 심급절차 내에서, 증거법이라는 절차법적 문제를 지적하면서 ‘피고인들의 무죄’를 판결한 제한된 것이었다. 이에 반하여 1심 법원의 판결은 절차적 관점을 넘어서서 판결 그 자체의 위법성을 대상으로 함으로써, 비록 민사 판결이지만 과거 ‘판결의 유죄’를 실질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2007년 8월21일은 사법의 오랜 암흑을 걷어낸 사법의 ‘새로운 아침’으로 기억될 법하다.
그러나 재심 판결과 이번 법원 판결을 통해 드러난 사법 과거청산의 법적 의미를 부정하려는 인식은 여전히 완강하다. 그저 ‘법 적용의 잘못일 뿐’이고, ‘과거의 판결을 현재의 잣대로 재단할 수 없’으므로 사법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역사가 심판할 영역이라는 것이 그 주요한 주장이다. 또는 ‘체계의 톱니바퀴’로서 명령에 충실했을 뿐이라는 나치 전범 재판 과정에서의 항변이 긴급조치 시대의 엄혹한 현실로부터 당시 판결의 위법성을 변호하는 논리로 유추되기도 한다.
책임을 법적 책임으로부터 배제하여 제한하려는 주장은 부당하다. 책임의 문제를 ‘자유로워지라’는 윤리적 명령의 차원으로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인혁당 재건위 사건’ 판결의 불법성의 근거가 되는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은 윤리적인 차원이 아니다. 사법권의 독립이라는 헌법적 명령이다. 1975년 4월9일의 대법원 판결은, 독재정권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법원이 사법의 독립을 훼손하여 저지른 ‘사법살인’이었다. 따라서 2007년 법원의 판결은, 오늘의 기준으로 과거를 판단한 것이 아니라, ‘사법의 독립’이라는 불변의 기준으로 과거 판결의 위법성을 은폐한 체제와 판결의 장막을 걷어낸 것이다. 물론 사법판단의 영역 외에도 여전히 윤리적·역사적 책임의 문제는 남는다. 법관 개개인의 사죄와 자기 고백이 윤리적 책임으로 요청되는 지점이다.
2007년 법원의 판결은 하나의 ‘시작’일 뿐이다. 사법의 정의를 회복하는 과제가 사법 내부의 노력만으로 완결될 수 없으며, 역사의 법정에는 최종 심급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청산이 현재의 창(문)을 통해 과거를 성찰하는 것이라면, 지금 필요한 것은 이 ‘새로운 시작’을 법의 영역을 넘어서 기록하고, 사회적으로 기억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록과 기억이 항상 새로운 의미로 살아 있도록 ‘사법살인’의 부끄러운 역사를 교육하는 것이다. 그것은 상처 난 자리에서 드러난 진실을 통해서 희망을 교육하는 것이고, 어제의 상처를 통해 오늘과 내일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을 여는 것이다.
정정훈/‘공감’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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