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원/문학평론가
야!한국사회
한국의 대법원에는 이른바 ‘정의의 여신상’이라는 조형물이 있다. 그 여신은 눈을 감고 있는데, 한 손에는 저울을 다른 한손에는 법전을 들고 있다. 저울은 양형기준의 형평성을, 법전은 법치의 엄격성을 상징하는 듯 싶다. 그런데 여신은 왜 눈을 감고 있는가. 정의로운 법적 판단을 불가능하게 하는 잡다한 유혹을 차단하기 위한 결연한 자세라고 설명되곤 한다.
나는 이 조형물을 볼 때마다 한 가지 아쉬움을 느낀다. ‘칼’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산재되어 있는 ‘정의의 여신상’의 여러 형태를 보면, 그 미묘한 형태론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법전’ 대신 ‘칼’을 들고 있는 모습을 흔히 발견하게 된다. 그 칼이 상징하는 것은 법 집행의 엄정함과 공명정대함일 텐데, 우리의 여신께서는 못다한 고시공부를 아직도 하고 있는 것일까. 긴 칼은 어디로 가고 없다.
게다가 여신께서 들고 있는 저울이라는 것 역시 현실 재판 속에서 판결의 엄밀한 형평성과는 거리가 멀어 보일 때가 많다. 영혼의 무게를 측량하지 못하듯, 죄의 무게를 측량하는 것은 어려운 일인데, 최근의 재판을 보면 죄의 반대편에 올려지는 것이 정의가 아니라 황금덩어리인 것 같다.
보통사람이라면 헤아리기 어려운 거액의 회삿돈을 횡령하고 배임한 재벌이, 그 기묘한 저울 위에서는 경제인으로서 사회에 기여한 바 크다는 엉뚱한 정상참작이 이루어진다. 세간에는 ‘북창동 습격사건’으로 희화화되는 명백한 폭행사건에 ‘아버지의 정’이라는 엉뚱한 수사가 개입되면서, 집행유예 선고가 남발된다. 저울이 고장난 것인지, 아니면 법전이 잘못 인쇄된 건지, 이조차도 아니라면 눈 감은 여신이 깜빡깜빡 졸고 있는 것인지, 알쏭달쏭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나는 여신이 졸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는데, 자신의 성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일련의 성추행 재판에서 기묘하게도 가해자를 옹호하고 있는 면모를 보면 그렇다. 여기자를 성추행한 야당의 한 국회의원에 대해 법원은 ‘고도의 가해의사’가 없었다는 동정론을 펼친다. 만취 상태의 폭탄주 문화 앞에서 정의의 여신은 졸고 있었던 것이다. 여직원에게 술 따르기를 강요한 남성 상사에 대해서는 ‘미풍양속’을 거론하는 엉뚱한 정상참작이 거론된다. 전직 국가대표 농구감독이 선수들을 자신의 방으로 불러들여 성추행했는데도 ‘농구발전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집행유예 판결이 내려진다.
아무래도 우리의 정의의 여신께서는 수치심을 모르는 것 같다. 정의는 온데간데없고, 돈과 권력과 미풍양속으로 치장된 남근주의가 여신의 저울 위에서 춤추고 있다. 상식의 눈금으로도 측량할 수 있는 사회적 범죄 앞에서, 비문 투성이의 기묘한 고어로 구성된 판결문의 만연체는 자주 황사바람을 날리고 있다. 법의 정의는 무력한 여신과 함께 꾸벅꾸벅 졸고 있고, 여신이 어딘가에 팽개친 녹슨 칼은 가난한 고물상으로 팔려나간 듯 싶다. 국가가 시장에 권력을 이양해 주었다는 말도 진실인 것 같다. 회삿돈을 횡령한 재벌 총수가 오늘은 남북 정상회담의 특별수행원으로 선정된 걸 보니 말이다.
독재시절 한국의 법원은 국가권력의 하수인이라는 조롱을 받았다. 그것이 사실이었기에 법에 대한 국민적 불신은 냉소에 가까웠다. 오늘의 법원은 자본권력 앞에서, 소피스트들이 쓸 법한 문장들을 판결문에 적고 있다. 냉소와 불신을 넘어 조소의 분위기가 국민들의 마음을 장악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여신에게 이렇게 권유하고 싶다. 졸고 있는 여신이여, 이제 칼을 들라.
이명원/문학평론가
이명원/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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