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이정/미술평론가
야!한국사회
대로 중앙에 내던져져 양옆으로 굉음을 토하며 쏜살같이 내달리는 차량을 겁에 질려 올려봤고, 머리털을 가르고 흐르는 선혈이 검은 아스팔트 위로 얼룩지는 걸 속수무책 지켜봤다. 내게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이제 한 달이 조금 지났다. 흔히 남 일처럼 여겼던 교통사고, 그것도 뺑소니를 체험했다. 자전거 주행 중인 나를 모범택시가 치고 그냥 내뺀 것이다. 폼 잡느라 ‘미관상’ 안전모 착용도 멀리해온 터라 효과까지 톡톡히 봤다. 머리가 찢어져 여섯 바늘 봉합 수술을 받아야 했고 2주간 모든 일정을 미룬 채 담당의가 주의를 준 뇌출혈이라도 올까 노심초사하며 칩거했다. 또 신원미상 도주범을 떠올리며 복수심에 분개했다.
라이딩에 재미를 붙인 이래 사다 모은 자전거가 다섯 대에 달했고(이 정도 대수로는 마니아를 입증하진 못하지만) 서울 시내 전 구간은 가급적 자전거로 주파했고, 인연만 닿으면 자전거 권장하기 바빴던 나로선 체면이 어지간히 구겨진 꼴이 되었다. 그래도 운이 좋았던지, 교통사고치곤 경미한 부상이라는 게 주변의 한결같은 의견이다. 허리 통증이 진행돼 나를 괴롭히곤 있지만, 근심했던 머리 부상이 별 탈 없어 감지덕지할 따름이다. 중거리 이상을 뛸 땐 안전모도 착용하려 노력 중이다. 그런데 후유증이 나를 방문했다. 흔히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지목되는 목·허리 부위 관절 등의 하자가 아니다. 마음이 멍드는 후유증이다.
사고 시점이 야간이었지만, 도주 운전자가 나를 인지 못한 건 아닐 것이다. 인파와 차량이 많았고 조명도 밝은 광교 한복판이어서다. 사고 차량은 나와 같은 차선에서 동일한 방향으로 진행 중 나를 스치듯 밀고 달아났다. 도로교통법은 자전거는 도로를 달려야 한다고 일러주지만, 자전거 주행을 해보면 알겠지만 차량 운전자들의 자전거 무시는 정도를 크게 지나쳐 있다. 유럽에서 차의 진행을 막는 느림보 자전거에게 경적을 울리는 걸 나는 보질 못했다. 추정컨대 사고 운전자는 도로 위를 ‘건방지게’ 점거한 ‘합법적’ 자전거 진입을 위협할 목적으로 스치듯 추월하려다 예상에 없이 내가 자빠지자, 주저하지 않고 도주한 것 같다.
정리하면 이렇다. 이번 사고는 운전자의 단순 부주의가 아닌, 차량의 부피에 따라 운전자의 대우 수위가 정해지는, 도로교통법보다 상위법인 운전자들 간의 정서적 관습법이 유감없이 집행된 경우겠다. 관습법에 의거해 사고 운전자는 탁월한 엔진을 과시하며 현장을 벗어났고, 사고가 초래한 모든 물리적·정신적 피해는 도로 위 소수자가 못난 탓으로 돌려지면서 사건 종료다. 내 경우가 딱 그랬다. 도로 위를 주행하라던 도로교통법의 권위도 이 순간 자전거를 보호하지 못한다.
내가 겪고 있는 후유증은 도로 위의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찾아왔다. 바로 무력감이다. 스스로 보호받을 수 없는 소수자라는 자각이 무력감과 우울증을 유발했다. 친환경적 이동수단, 교통체증의 대안, 교통비 절감, 하체 강화. 자전거 권장을 둘러싼 예찬이다. 나 또한 이런 이유로 자전거에 매료됐고, 주변에 권장했다. 하지만 끔찍한 대형 참사는 라이더가 도로 위에 나설 때 직면하는 하나의 개연성 있는 세계다. 자전거의 불안정한 구조상 불가피한 경우이기도 하나, 그것이 차량 운전자의 덩치 우월주의 때문이라면 어느 모로 보나 분하고 부당하다. 서울시의 시책 사업에 자전거 활성화 방안이 있다고 들었다. 대여 자전거 대수도 늘린다고 한다. 그렇지만 운전자들의 포악한 관습법이 장악한 도로 사정을 참작해서 라이더를 입체적으로 보호할 대책부터 연구하길 권한다. 책상머리를 붙들고 고민하지 말고 전문가 그룹에 자문하라.
반이정/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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