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남구 논설위원
유레카
1969년 6월7일 서울지검 공안부는 크레용 제조업체 삼중화학공업 사장 박진원씨를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입건했다. 이 회사가 8개월 전 내놓은 크레파스와 그림물감 등의 상표로 프랑스 화가 ‘피카소’의 이름을 쓴 게 문제였다. 공안당국은 피카소가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해 활동한 전력이 있고 <한국에서의 학살>이란 그림을 그린 좌익 화가라며, 그 이름을 상표로 쓴 것은 “국외공산 계열에 동조하고, 찬양고무하는 일”이라고 못박았다.
검찰은 ‘피카소 크레파스’ 등의 상품 광고를 더는 못하게 하고, 시중에 이미 풀려나간 제품에서도 ‘피카소’란 이름을 모두 지우게 했다. 검찰은 심지어 텔레비전 드라마에 ‘피카소’란 별명을 가진 등장인물을 기용한 제작자를 불러 조사하고, 쇼 프로그램에서 “피카소 그림같이 훌륭하다”는 표현을 쓴 사회자를 소환해 ‘의도’를 캐묻기도 했다.
군사정권 시절 공안당국은 ‘노동’이나 ‘인민’같은 단어를 쓰는 것도 ‘불온’하게 봤다. ‘노동’은 북한의 조선노동당에, ‘인민’은 인민군, 인민공화국에 들어간 단어라는 게 이유였다. 하지만 ‘노동’은 반공을 앞세운 이승만 자유당을 만들면서 애초 그 이름을 ‘노동당’이라고 지으려 했을 만큼 누구나 자연스럽게 쓰던 표현이다. ‘인민’도 조선왕조실록에 ‘국민’보다 훨씬 많이 나오는 단어로, 영어의 ‘피플’에 가장 잘 맞는 표현이다.
피카소의 이름이나 이런 단어에까지 ‘불온’ 혐의를 씌운 것은 일종의 강박증일텐데, 치유가 참 어려운 모양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남북 정상회담을 위해 지난주 방북한 길에 서해갑문을 들러보고 방명록에 “인민은 위대하다”고 썼다. 그러자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국가의 전유물처럼 돼 버린 용어를 썼다”며 트집잡는 이들이 또 나왔다. 그들은 아마 지금도 ‘피카소’의 이름을 결코 입에 담지 않을 게다.
정남구 논설위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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