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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한국사회] 미안해요, 찬드라 / 권수현

등록 2007-10-22 18:06

권수현/한국여성민우회 편집위원
권수현/한국여성민우회 편집위원
야!한국사회
박찬욱 감독의 단편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는 한국말이 서툰 한 네팔 여성 노동자가 행려병자로 취급되어 무려 6년4개월 동안 정신병원에 갇혀 있었던 실화를 다룬 영화다. 한국말이 서툰 찬드라는 분식점에서 먹은 라면 값을 치르지 못하는 상황을 이해시키지 못해서 경찰서에서 정신병원으로 인계되었다. 이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던 당시, 나는 이런 황당하고 무자비한 일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한편으로 놀랍고 또 한편으로는 부끄러웠다. 그러한 감정들은 이내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그러한 인권침해를 가능케 한 조건이 지극히 평범한 우리들의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그녀에 대해 증언하는 평범한 사람들은 이 사건의 공범으로 등장한다. 어느 누구도 한국인과 흡사한 외모의 그녀가 외국인일 수도 있다고 짐작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병원 관련자들 중에서는 자신이 네팔 사람이라는 그녀의 주장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는 사람들이 생겼지만 누구도 그녀의 신원을 적극적으로 확인해 보지 않았다. 동료 네팔 노동자들의 실종신고는 한국 관료들에 의해 간단히 무시되었다. 찬드라에게 가해진 인권침해는 이러한 총체적 상황의 합작품이었다. 그 일은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상상력의 결핍이 만들어낸 사건이었다. 어느 누구도 우리와 닮은 외모를 한 그녀가 우리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으니까. 또한 그것은 한국 사회에 내면화하고 있는 위계적 언어관의 결과이기도 했다. 그녀가 ‘좀 모자라는 사람’, 어린애 취급을 당한 건 단지 한국말이 서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를 대한 사람들은 그녀가 구사하는 네팔어를, ‘우리보다 못한 나라’인 네팔어를 우리말과 동등한 위상을 가진 한 나라의 언어라고 생각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네팔어를 사용하는 그녀를 우리와 동등한 인간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에게도 이와 비슷한 경험은 있다. 사투리가 표준어에 비해 ‘우습거나’, ‘좀 격이 떨어지는’ 말로 받아들여져 주눅 든 기억도, “Do you speak English?” 하고 낯선 외국인이 다짜고짜 영어로 말을 건넬 때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자신을 부끄러워한 기억도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에게 익숙한 장면들이 한 인간에 대한 폭력과 인권 침해를 가능케 하는 문화적 조건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하게 한다. 언어는 위계적 인간관을 내면화하는 매개물이다. 국내 비영어권 외국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외국인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동질화하고 그들에게 반말을 하거나 ‘어린애 취급’하는 광경을 쉽게 목도하게 된다.

혹자는 지금 한국 사회를 휩쓸고 있는 영어교육 열기를 ‘영어 광풍’이라고 일컫는다. ‘영어 광풍’이 위험한 것은 그것이 한국 사회에서 문화적 다양성의 가치를 상실하게 만들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중심과 주류의 언어를 최고의 가치로 지향함으로써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상상력을 제약하고 우리 내면에 타자에 대한 멸시와 무시의 태도를 각인시키기 때문이다. 그것은 제국주의적 가치관이다. 세계화란 과연 무엇인가? 만약 그것이 힘 가진 자의 언어와 가치관을 닮아가는 것이라면 그것은 문화적 다양성과 공존의 가치를 파괴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게 획일화된 상상력은 ‘제2, 제3의 찬드라들’을 만들어낼 것이다. “미안해요, 찬드라.” 그때마다 우리는 진정성 없는 사과를 되풀이할 것인가? 초등학교에서 교과목을 영어로 가르치도록 하겠다는 이명박 대선 후보의 약속이 현실이 될까봐 두려울 뿐이다.

권수현/한국여성민우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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