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남구 논설위원
유레카
영국의 사진가였던 제임스 빅스는 1921년 사고 후유증으로 시력을 잃었다. 이때부터 그의 눈을 대신한 것은 지팡이였다. 그런데, 집 주변에 차가 많이 다니는 것이 고민거리였다. 그는 궁리 끝에 사람들 눈에 더 잘 띄게 지팡이를 흰 페인트로 칠했다.
미국 페오리아시 라이온스 클럽 회원 조지 본햄은 1930년 검은 지팡이를 손에 쥔 한 시각장애인이 길을 건너는데 큰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았다. 지팡이가 길 색깔과 비슷해 운전자들에게 잘 보이지 않는 까닭이었다. 본햄의 노력으로 이듬해 시의회는 “페오리아시에 살고 있는 시각장애인은 흰지팡이를 갖고 다녀야 한다”는 조례를 만들었다. 같은해 프랑스의 길리 허브몽도 파리의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흰지팡이 5천 개를 기부하고 보급 운동을 벌였다. 흰지팡이는 그렇게 시각장애인 보호의 상징이 되어갔다.
1980년 세계맹인연합회는 10월15일을 ‘흰지팡이의 날’로 정하고, ‘흰지팡이 헌장’을 선포했다. “흰지팡이는 시각장애인의 자립과 성취를 나타내는, 세계에서 공인된 상징이다. 어떤 예상치 않은 상황에서도 시각장애인이 신속하게 적응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해주는 도구다”란 내용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72년 도로교통법을 만들 때 그런 뜻을 담았다. 시각장애인이 홀로 길을 다닐 때 흰지팡이를 들고 다니도록 보호자가 돌보게 하고, 흰지팡이를 짚고 길을 건너는 시각장애인이 있으면 운전자들은 한동안 멈추게 했다.
한국경제연구원이 최근 규제 철폐를 촉구하는 보고서에서 흰지팡이 제도는 시각장애인에게 불편만 주는 쓸모없는 규제라고 지적했다. 몇몇 언론은 한술 더 떠 “시각장애인이 빨간색이나 노란색 지팡이를 짚고 다니면 안 된다는 규제는 황당하다”고 비웃었다. 세계 곳곳에서 ‘흰지팡이의 날’ 행사가 열린 며칠 뒤의 일이다.
정남구 논설위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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