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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한국사회] 한국어가 문제다 / 이명원

등록 2007-10-24 18:12

이명원/문학평론가
이명원/문학평론가
야!한국사회
한 대학에 재직 중인 후배 교수를 만났더니, 다음 학기부터는 영어로 강의를 해야 한단다. 한국 문학 강의를 한국인 학생에게 하는데, 좋은 우리말을 놔두고 웬 영어란 말인가. 어처구니없는 일이긴 한데, 학교 방침이니 어쩔 수 없지 않으냐는 표정을 짓는다.

그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이 요즘의 대학에는 가득하다. 이 어쩔 수 없는 교수들의 표정도 그러하지만, 그런 교수들의 강의를 어쩔 수 없이 따분하게 들어야 하는 학생들의 신세도 가련하다. ‘졸업인증제’ 운운하면서 대학생들에게 반강제적으로 토익과 토플, 텝스 등의 일정한 영어능력 검증을 도입하는 대학도 부지기수다.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강의도 아니고, 내국인을 위한 외국어 강의를 한다는 ‘역발상’이 마치 무슨 개혁인 것처럼 떠벌려지는 데서 더 나아가, 어느 대선후보는 이제는 초등학교부터 영어 강의를 하게 해야 한다는 우스꽝스런 제안을 정색을 하고 주장하고 나섰다. 한 소설가가 그 대선후보에게 먼저 한글맞춤법부터 숙지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는데, 옳으신 말씀이다.

대학 시절, 나도 이른바 영어 강의란 것을 들어본 적이 있다. 이웃 학과인 영문과에서 셰익스피어 관련 과목을 수강했는데, 자못 당당하게 “하우 아 유” 하고 인사를 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우왕좌왕이었다. 영문학과니까 국문학과에 비하면, 셰익스피어에 대한 좀더 심층적인 논의가 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했지만, 결과는 자못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학생과 교수 사이의 기본적인 의사소통은 이른바 ‘바디 랭귀지’라는 것이 있어 대충 가능했지만, 문제는 우리들의 셰익스피어였다. 그 학기 강좌 내내 학생들이 했던 공부란 셰익스피어 희곡에 등장하는 각각의 배역을 분담하고, 수업 내내 자신이 맡은 배역의 대사를 읽어 내려가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세로로 책을 세워 낭랑하게 소리 내어 읽던 국어 시간과 비슷했던 느낌이다.

그 반대의 경험도 요즘은 자주 하게 된다. 대학 간의 국제교류가 활발한 탓인지 많은 수의 외국인 유학생들이 한국 대학에 재학하고 있다. 내가 하는 강좌에도 외국인 학생이 여남은 명 있는데, 한국어 강의를 그들이 잘 소화하고 있는지 확신이 들지 않을 때가 많다. 대학원에 다닐 때도 외국인 동료가 여럿 있었는데, 그중의 몇몇 학생들은 수업시간 내내 사전을 찾느라고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외국인 처지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문어’와 ‘구어’의 불일치, 언어의 맥락과 뉘앙스에 대한 인식의 어려움, 그리고 더 큰 의미론적 맥락으로서 한국 문화의 전개 과정에 대한 지식의 부재에서 오는 이해의 한계일 것이다. 언어를 하나의 도구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모든 언어는 그 언어를 사용해 온 언어공동체 공동의 기억과 무의식을 켜켜이 축적하고 있다.

의사소통의 수단으로서 외국어를 학습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강의 장소에서 우리가 확인하게 되는 커다란 난관은, 모든 언어는 번역을 불가능케 하는 자체의 문법적·의미론적 자질을 무수히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번역이 안 되게 하는 언어적 요소들에 대한 깊은 이해가 동반되어야 고급 지식의 전달이 가능해진다.

문제는 오늘의 학생들이 실제로는 한국어 활용 능력, 더 나아가서는 고전 한국어의 기반이 되는 한자어 능력조차 매우 낮은 수준에 있다는 것이다. 영어가 문제가 아니라 한국어가 문제다. 흔하게 보는 청첩장에서조차 “아뢰올 말씀은(…) 혼인을 하게 되었음을 아뢰옵니다” 식의 비문이 넘쳐나는 곳이 오늘의 한국 아닌가.

이명원/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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