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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한국사회] 그가 준 선물 / 이명원

등록 2007-11-14 18:12

이명원/문학평론가
이명원/문학평론가
야!한국사회
먼 곳에 있는 친구들로부터 연락이 온다. 일하는 기계도 아니건만 동파된 파이프처럼 시간이 줄줄 샌다. 한 달에 한두 번은 가신 이를 문상하는 일상이건만, 살아있는 그대들을 만나는 일이 왜 이리 빠듯한 것일까. 한 시절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무슨 교가처럼 불러대던 시절이 있었는데, 벗들아 이젠 ‘낭만에 대하여’를 부르는 최백호의 고독을 알 것 같지 않으냐. 중력에 순응하는 지친 피부, 여위어 가는 너의 머리카락은 피로한 중년의 맞춤한 은유이겠지.

혜화역이었다. 다리를 절뚝이는 사내였다. 걷다보면 풀어진 눈동자도 함께 흔들렸다. 때 전 점퍼와 청바지였다. 구두 뒤축은 심하게 닳아 있었다. 악취가 코를 찔렀다. 그가 걸어오는 동선을 따라 홍해처럼 사람들이 갈라졌다. 어떤 이는 눈썹을 찡그리며 신경질적으로 휴대폰 덮개를 닫았다. 수은주가 매섭게 떨어져 작은 소음조차 쩍쩍 갈라졌다. 그때 나는 길게 담배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만나기로 한 벗은 도착하지 않았다.

사내가 온몸을 절뚝거리면서 내게 다가왔다. 피고 있던 담뱃불을 끄자 사내가 말했다. “담배 한 대만 얻을 수 있을까요?” 그는 혜화동에서 힘든 노숙생활을 하고 있었다. 노숙생활이라고 했지만, 내가 본 그의 모습은 지금은 사라진 혜화역 앞 벤치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전부였다. 가끔 구걸한 음식을 비둘기들과 나눠먹기도 했다. 따뜻한 날이면, 함부로 눕지 말라고 세로로 막대를 박아둔 마로니에 공원의 벤치에서 토막잠을 자기도 했다.

혜화역 계단을 분주하게 내려갈 때면, 얼굴을 무릎 사이에 박고 엉성한 드링크 상자를 내밀며 쓰러져 있는 장면도 자주 목격했다. 우연이겠지만 그와 나는 청량리역 방향으로 지하철을 같이 타기도 했다. 지금은 사라진 청량리역 광장에서 한 종교단체의 무료급식으로 끼니를 해결할 요량이었을 것이다. 그가 전철에 오르면, 객실의 승객들은 놀란 고양이들처럼 흩어졌다. 나는 그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차비가 없다고 해 천원 지폐 몇 장을 주었던 기억이 난다. 기묘한 일이지만 나는 시청 앞에서, 그리고 신촌역과 영등포역 앞에서 걷고 있는 그를 우연히 본 적도 있다. 그는 과장되게 커다란 배낭을 메고 있었다. 그는 어디로 가는 걸까.

나는 담배 곽을 열고 담배 두 대를 그에게 주었다. 아니 세 개비를 주었던 것도 같다. 그때 흔들리던 그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나는 그 고요한 침묵의 이유를 라이터의 부재 탓이라고 성급히 단정했다. 불을 붙여주려고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냈는데, 그때 동전 700원이 함께 나왔다. 그런데 침묵하고 있던 그가 망설이는 표정을 짓더니, 주머니에서 두 개의 라이터를 꺼냈다. 그리고는 그 중의 하나를 나에게 건네면서 말했다. “이 라이터를 받아주세요. 제가 줄 것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나는 가볍게 놀랐다. “또 필요한 것은 없습니까?” “천 원만 주실 수 없을까요. 배가 고픕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주머니에 있던 700원을 꺼내 그에게 주었다. “이것밖에 없군요.” 그때 내 지갑 속에는 천원 지폐는 물론, 만원짜리 지폐도 제법 두둑했다. 벗들과의 만남에 쓸 요량이었다.

얼마 후 그가 절뚝거리며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고 난 후, 나는 한동안 그가 준 라이터를 골똘히 바라보았다. 청테이프가 라이터의 허리에 돌돌 감겨져 있었다. 버릇처럼, 뒷주머니의 두툼한 가죽지갑도 만져 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그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자신이 심하게 부끄러워졌다.

이명원/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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