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이정/미술평론가
야!한국사회
요즘 사정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소풍과 어린이날을 제하면 놀이문화가 변변치 못한 나의 소년기에 유일한 재미로 어린이 잡지가 있었다. 부담스러운 가격으로 친구들끼리 돌려 보거나 각종 기념일의 선물 대용으로 부모를 졸라 사다 본 기억마저 생생하다. 19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전성기를 구가한 이들 잡지는 80년대 말 전후로 폐간되었다. 순수한 환심을 낚아채 호주머니를 턴 어린이 잡지의 인기 비결은 인기 만화의 전면 배치와 특집 보도의 선별이었는데, 이 중 두고두고 깊은 인상을 남긴 건 심령치료, 초능력, 유에프오, 사후세계 체험담 등이었다.
이제는 전부 사이비 과학으로 분류, 폄하되지만 그 무렵 이성적 판단이 성숙지 못한 소년에게 물리법칙을 초월하는 초능력의 매력은 가히 절대적이었다. 급기야 1984년 9월 <한국방송> 스튜디오에 초능력계의 간판스타 유리 겔라가 직접 출연했다. 무려 120여분간 초능력 시연이 생중계되자 브라운관 너머로 기적을 목격한 소년은 초능력에 관해 제기되는 그 어떤 의혹에도 귀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불가항력적 위기나 세상의 부조리를 겪을 때마다 나도 언젠가 초능력을 연마해 세상에 복수해 주리라며 위안 삼기조차 했으니.
그런데 소년이 장성하자 상황은 급반전했다. 다양한 정보 접근으로 어린이 잡지의 환상적 픽션에서, 냉엄한 논픽션 리얼리티로 관심사가 옮겨갔다. 그가 접한 모든 폭로성 시사 보도와 과학 저널들은 한입으로 유리 겔라의 초능력을 사기꾼의 눈속임과 농간으로 규정했고, 그걸 입증할 냉정한 논거도 다수 들이댔다. 심지어 한국 공연이 성사되기 수년 전부터 현지에서는 그의 눈속임이 셀 수 없이 폭로된 터였고, 비판자를 고소한 유리 겔라의 소송은 패소했다.
그렇다면 십수년 전 소년과 동세대의 동심을 검증 안 된 선정 보도로 물들인 어린이 잡지는 모종의 책임을 통감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분개에 찬 이런 주장이 비약인 걸 안다. 공중은 미디어의 조정이 아니어도 쉽게 속는다. 심지어 검증을 거친 진실 공개조차 철옹성 같은 맹신 앞에서 무력한 예는 실로 많다. 진실의 융단폭격을 맞은 신비주의자 유리 겔라도 여전히 베스트셀링 ‘초능력자’로 활약 중이니 말이다.
지난주 <문화방송> 피디수첩은 피눈물을 흘린다는 나주 성모상과 얽힌 구전되는 기적들의 허상을 낱낱이 탐사 보도했다. 성모상의 기적과 허구에 대해선 이미 천주교 광주교구조차 인준하지 않았지만, 집회에 운집하는 1천여 추종자를 가로막지 못한단다. 맹종의 집단화가 과학적 검증이나 진실 논박에도 건재한 예는 비단 종교 현상 또는 이른바 초자연적 기적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전 영역에 걸쳐 포괄적이고 위험한 수준으로 관찰된다. 불과 2년 전 황우석씨가 한심할 정도로 황당한 사기극으로 전 세계를 농락했지만, 사실을 폭로한 방송사는 존폐 위기에 몰릴 만큼 여론의 질타에 시달렸고 조작이 기정사실화된 연후에도 추종자의 시위는 오늘까지 진행 중이다. 황씨는 교주가 아닌 과학자였지만 양상은 초능력 신봉과 흡사했다.
논리적으론 설명되지 않는 여론조사 결과는 2007년에도 우리를 기다린다. 삼성 비자금 로비가 사실로 드러날 경우 경제를 고려해 선처해야 하다는 의견이 철저한 수사 의견과 거의 비슷한 47.5%(<한국일보> 11월8일치)로 나타났고, 이명박씨의 비비케이(BBK) 의혹이 사실이어도 계속 지지하겠다는 의견이 34.1%(<중앙일보> 11월1일치)나 나왔다. 도덕적 치명상에도 국민경제를 한숨에 부활시킬 초능력자라면 모든 허물을 용서한다는 식이다. 이들의 경제 부활 초능력은 입증된 바 없고, 다만 당사자와 신봉자 사이의 굳은 신념으로만 존재할 따름인데 말이다. 어째 돌아가는 양태가 유리 겔라 사태와 흡사하다.
반이정/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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