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이정/미술평론가
야!한국사회
2006년 5월 서울시장 입후보자의 선거용 펼침막이 도심에 걸렸을 때, 후보별 홍보 배너들의 면면을 비교하던 중 나는 강금실의 낙선을 직감했다. 하기야 그 무렵 여론조사 결과 오세훈과의 지지율 격차로 강금실의 패색이 짙어진 상황이긴 했다. 헌정사의 선거 홍보물을 모조리 검토하진 않았지만, 강금실의 정치 광고미학은 첫눈에도 전무후무한 면이 많았다.
먼저 펼침막. 보색 대비가 유난히 강조된 조야한 원색 구성 속에 구역질나는 공약을 대문짝보다 약간 작게 기재한 여느 후보들과 달리, 블랙에서 자주로 색조가 이행된 바탕에 깍지 낀 강금실의 야심찬 얼굴을 흑백사진으로 묻어 버렸다! 블랙이 주도하는 단 3도짜리 흑백 배너는 품격은 갖췄으되 공중에겐 이질적이었다. 선동적 간판 문화에 숙달된 대중 감식안을 정면으로 거스른 셈인데, 구호마저 간결해서 ‘보람이가 행복한 서울’이라니! 유권자의 호기심을 단계적으로 자극할 티저 광고의 효과를 노려 ‘보람 있게 살아야 한다는 의미’를 명백히 암시한 걸 테지만, 관공서 스타일의 표어를 메시지로 평생 간주해 온 시민에게 ‘보람이’마저 추상적 어휘로 읽혔을 것이다.
이 전위적 배너의 후속타도 만만찮아, 강 후보의 얼굴은 아예 자취를 감추고 긴 연필을 대각선으로 눕히고 상단에 ‘정치는 짧고, 교육은 길다’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메시지의 단순미는 능히 이해가나 ‘맑은 서울! 매력 있는 서울!’(당시 오세훈 후보의 구호)처럼 서울과 느낌표를 각각 두 번 반복한 직설법과는 차이가 컸다. 강금실 후보는 벽보와 공보물에서 당시 열린우리당의 노란색조차 사용하지 않고 기품 있게 흑백을 고집했다. 공보물 표지는 강 후보가 아닌 여자아이(아마 보람이)의 흑백 사진이 대체했다. 이 정도 홍보 실험이면 게임 끝난 거 아닌가? 대중적 소구력에 호소해야 할 정치 공학이 유권자의 무난한 취향을 외면했으니. 결국 패장이 되었지만 강금실 배너의 성취는, 이미지를 근접 탐구해야 하는 나 같은 이에겐 당선 이상의 징후적 가치로 해석된다.
서구 모더니즘 미술사의 주도권을 유럽에서 뉴욕으로 옮겨오는 데 이론적 기여도가 가장 높은 미술 비평가로 클레멘트 그린버그를 꼽는다. 그는 29살에 기고한 에세이 <아방가르드와 키치>(1939)로 미국식 모더니즘 미학과 자신의 경력을 탄탄대로 위에 올려놨다. 신화적인 에세이의 요지는 이렇다. 소비사회의 입맛에 영합하는 대중문화와 아카데미즘 미술은 반동적 가치를 강화시키고 재생산하기에 이것은 싸구려 예술, 키치다. 반면 그와 대척점에서 정치·경제·사회 등 외부 요인에 종속되지 않고 예술의 순수성을 옹립하는 매체 중심적 예술이 그린버그가 지지하는 아방가르드다. 이해를 돕자면, 그 어떤 대상도 재현하지 않고 매체성만 극단적으로 강조한 추상 회화를 떠올려 보면 된다. 그러나 교감의 채널을 포기한 이런 ‘자족적’ 아방가르드를 좌파 비평가 티 제이 클라크는 시각적 신비주의라고 비판했다.
미술사는 아방가르드가 악전고투 끝에 키치를 극복한 것으로 기술하는 편이지만 종국에는 미술계에서 경전화하고 정치·경제적 헤게모니의 조종 아래 놓인다는 점에서 절반만 맞는 말이다. 한편, 정치사에선 전적으로 키치가 아방가르드에 압승해 왔다. 결국 탄로가 날 후보자의 허황된 자질과 비현실적 공약은 거대하고 위압적 문구와 판에 박힌 원색 조합 속에 위장되지만 다수 유권자는 거대한 거짓말에 농락당해 이들의 집권을 돕는다. 거짓도 모자라 도심 미관까지 해치는 이런 키치 예술을 지켜봐야 하는 요즘, 이론적으로 아방가르드랄 순 없으나 최소한 키치의 혐의는 탈피한 강금실 배너가 사정없이 그리워진다.
반이정/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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